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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

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Saint Madeleine of Canossa)

축 일 : 4월 10일

신 분 : 설립자

활동 지역 : 카노사(Canossa)

활동 년도 : 1774-1835년

같은 이름 : 마들렌, 막딸레나


1774년 3월 1일 이탈리아 베로나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성녀 막달레나(Magdalena)는 어 려서 부친을 잃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남겨둔 채 재혼하 여 떠나버렸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8세였다. 그의 형제들은 삼촌 밑에서 자랐는데, 삼촌 의 학대 때문에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수녀가 될 마음 으로 가까이 있던 카르멜회로 갔으나 성소가 없었던지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 당시 나폴 레옹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바로 그 나폴레옹이 그녀의 카노사 성을 둘러보러 왔을 때, 그 녀는 용기를 내어 텅 비어 있던 성 요셉(Josephus) 수도원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쾌히 승낙하였다. 그녀는 여기서 가난한 사람과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착수하였다.


또 성녀 막달레나가 베네치아(Venezia)로 갔을 때에는 빛나는 옷을 입은 6명의 수도자 들에 둘러싸인 성모님의 환시를 보고 즉시 성모의 명을 따라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모든 사업은 나폴레옹의 도움이 컸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애덕의 딸 카노사 수녀회’를 설립 한 것이다. 비오 11세(Pius XI)는 그녀를 이렇게 평하였다. “많은 이들이 자선사업을 하 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가난해 지기는 지극히 어려운데 그녀는 실제로 가난하였다.” 그녀는 1941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 고, 1988년 10월 2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


(가톨릭 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녀 카노사의 막달레나 - 카노사 자비의 딸들 수도회 창립자


성녀 카노사의 막달레나(Magdalena de Canossa, 1774-1835)는 1774년 3월 1일 이탈리아의 베로나(Verona)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당시 이름은 막달레나 가브리엘레(Magdalena Gabrielle)였다. 아버지인 카노사의 오타비오(Ottavio of Canossa) 후작은 박물학자이자 지리학자로 고대 이탈리아 귀족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스루그(Maria Teresa Szlugh) 후작부인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황후를 모시는 수행원 겸 궁정 귀부인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 있는 궁정에 살았 다.


막달레나가 겨우 다섯 살 때 그녀의 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어머니는 죽 은 남편을 애도하는 관습을 모두 준수하고 유산을 관리하다가 2년 후 재혼하여 막달레나 와 네 자녀의 양육을 막달레나의 숙부인 예로니모(Jerome)와 유산을 관리하는 하인들에게 위탁하였다. 막달레나는 어렸을 때 큰 병으로 여러 번 고통을 받았지만 성장하면서 튼튼 해졌다. 그녀의 숙부 예로니모는 물론이고 다른 친지들 역시 막달레나가 그리스도께 자신 을 온전히 봉헌하였고 장차 수도회에 입회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막달레나는 집 근처에 있는 가르멜회(Carmelite) 수녀원에 들어가 장기 피정을 하면서 한 동안 그 수도회에 입회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살이 되었을 때 자기 가족의 재산을 모두 관리해야 할 책임을 맡게 되자 그 꿈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막달레나는 놀라운 재 능을 발휘하여 재산을 잘 관리하였다. 하루는 나폴레옹(Napoleon)이 장교들과 기병대와 함께 막달레나가 사는 성을 찾아와 숙식을 청하자 막달레나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나폴레 옹은 그 성에서 머무는 동안 막달레나를 ‘천사’라고 부르며 그녀를 깍듯하게 대하였다.


1803년 막달레나의 가족들이 다시 재산을 관리하게 되자 막달레나는 비로소 그 책임에서 벗어나 평소 꿈꾸던 사도직에 투신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지역에 사는 가난한 어린들 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어떻게 하면 그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를 고심하였다.


1805년 막달레나는 폐쇄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Augustian) 건물에 학교를 열었는데 당시 프랑스 항제가 된 나폴레옹은 그 소식을 듣고 이 수도회 부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정식 문 서로 이양해 주었다. 학교가 개교하였을 때 막달레나를 도와 학교에서 일하던 젊은 처녀 들은 1808년 카노사 자비의 딸들 수도회가 창설되었을 때 첫 입회자가 되었다. 이 수도회 는 곧 베르가모(Bergamo)와 밀라노(Milan), 트렌토(Trent) 그리고 베니스(Venice)로 퍼져 나갔다. 현재는 수많은 나라에 자리 잡은 395개의 수녀원에서 4,000여 명의 수녀들이 창 설자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막달레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자비의 ‘불길’이라고 하면서 자 신이 몸소 이를 실천하여 사람들에게 거룩한 모범을 보여 왔다. 그리고 막달라 가브리엘 은 영신적으로 신비한 신앙체험을 할 수 있는 은사를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 이에 관련된 많은 은총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막달레나는 기도 중에 몸이 공중으로 부양되는가 하면 많은 환시를 체험하였고 무아지경 에서 깊은 환희를 맛보기도 하였다. 자비의 본보기였던 막달레나 역시 말년에 신체적으로 극시만 고통에 시달렸지만 이를 영웅적으로 잘 인내하였다.


막달레나가 베로나에서 선종하자 사람들은 그 유해를 대리석 석관에 안치하였다. 1941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를 시복하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8년 10월 2일 열린 시성 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카노사의 막달레나 수녀는 주민들이 물질적인 가난에 시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 적으로도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면서 매우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체 높은 숙녀들이 자신의 신분과 특권을 누리면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방식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면서 도 자신은 그들과 거리를 두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식으로는 그들을 ‘사랑’할 수 없 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막달레나 수녀는 신비 체험의 높은 경지에서 하느님께 향한 뜨 거운 사랑과 열정에 사로잡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투신하였고 그 결과로 따라 오게 되는 사랑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카노사의 막달레나 성녀의 축일은 4월 10일이다.

[교회와 역사, 2011년 4월호, 번역 송영웅 바오로(봉명학원 재단이사)]


 

참고자료


■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녀 카노사의 막달레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156-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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