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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다의 성녀 마더 데레사


콜카다의 성녀 마더 데레사 (Saint Mother Teresa of Kolkata)



축 일 : 9월 05일

신 분 : 수녀,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 지역 : 인도 콜카다(Kolkata of India) 구. 캘커타

활동 년도 : 1910-1997년

같은 이름 : 테레사, 테레시아



성녀 마더 테레사(Mother Teresia, 또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터키가 점령 중이던 알바니아(Albania)의 스코페(Skopje)에서 알바니아계인 아버지 니콜라 보약스히야(Nikola Bojaxhiu)와 어머니 드라네 보약스히야(Drane Bojaxhiu)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다음날 곤히아 아녜스(Gouxha Agne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녀가 태어난 지 2년 뒤인 1912년 알바니아는 터키로부터 독립했지만 스코페는 여전히 알바니아의 영토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스코페는 세르비아를 모태로 탄생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한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이다.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신심 깊은 어머니로부터 철저히 신앙교육을 받은 그녀는 9살 때 건축업자였던 아버지를 갑자기 여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소녀 시절부터 성인전과 선교사들의 이야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18세 되던 1928년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평소 선교에 대해 갖고 있던 관심이 자신을 수도성소에로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예수회원인 본당신부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그 해 11월 29일 인도의 콜카타에서 전교 중인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의 로레토 수녀회(Sisters of Loreto)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더블린에서 집중적으로 영어를 공부한 후 1929년 인도(India)에 도착하여 히말라야 산맥 근처에 있는 다르질링(Darjiling)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1931년 5월 24일 첫 서원을 하면서 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된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의 이름을 자신의 수도명으로 택했다. 그 후 7년간 테레사 수녀는 로레토 수녀회가 운영하는 콜카타(옛 지명은 캘커타, Calcutta)의 성모여자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1937년 5월 24일 그녀는 종신서원을 했고, 1944년에는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46년 9월 10일 연례 피정 참석차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테레사 수녀는 그녀 스스로 후에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 묘사한 놀라운 체험을 했다. 그녀는 수도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속에 살며 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소명을 들은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교황청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1948년 수도회 밖에서 수도자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전통적인 서구식 수녀복장이 아닌 인도 여성들이 평상복으로 입는 사리를 수도복으로 택한 그녀는 우선 성가정 병원에서 속성으로 기초 간호학을 이수한 후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 19일 성모여자고등학교 출신 제자인 슈바시니 다스가 찾아와 아직 형성되지도 않은 수도회에 받아주길 간청해 첫 지원자로서 마더 테레사와 합류했다. 그리고 1950년 10월 7일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살고자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가 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처음부터 함께한 12명의 회원들이 수련기를 시작했다. 1952년 8월 22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정원까지 아픈 이들로 꽉 들어찼다. 1953년 사랑의 선교회 본원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빈민굴의 고아들을 위한 집과 콜카타 외곽에 나환자들을 위한 자립 센터도 열었다.


1965년 2월 1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사랑의 선교회가 세계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었다. 교구 설립 수도회로서 지역 주교의 관할 안에서만 활동하던 사랑의 선교회가 이제는 세계 어디서나 선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이미 사랑의 선교회에는 3백여 명의 수녀들이 여러 개의 시설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베네수엘라(Venezuela)에 해외 첫 분원을 연 이후 아프리카, 호주, 유럽 등 여러 대륙에 진출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더 테레사의 적극적 후원자가 되어 그녀가 선교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바티칸 시민권을 수여했다. 이렇게 해서 1971년에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 50여 개의 분원을 갖게 되었다.


1969년 3월 26일 ‘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회칙을 인가 받아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협조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사랑의 선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마더 테레사와 사랑의 선교회 활동이 세계 곳곳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여러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1979년 12월 10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더 테레사는 그 상을 자신이 온 삶을 바쳐 섬기고 사랑한 가난한 이들의 이름으로 받았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후 사랑의 선교회는 더욱 놀라운 속도로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1970년 이후 마더 테레사는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고 사회 복귀를 돕는 치료 센터를 여러 곳에 열었다. 또한 나환자 병원과 나환자들을 위한 재활 및 사회 복귀 시설을 운영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호 시설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그리고 결핵 환자들과 영양실조 걸린 이들을 위한 치료소 및 요양소들도 설치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활동도 시작했다.



1990년 4월 16일 마더 테레사는 건강을 이유로 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같은 해 9월 총장직에 다시 선출되었다. 1997년 9월 5일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며 세계 모든 이들의 영적 어머니인 마더 테레사는 87세를 일기로 콜카타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선종 소식에 종교와 이념, 민족과 인종을 초월해 전 세계가 한결같이 ‘인류의 참 어머니’를 잃었다며 애도하였다.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살아서부터 ‘성녀’로 추앙받았던 마더 테레사 수녀의 시복식을 선종 6년 만에 거행했다. 교황은 30여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마더 테레사를 새로운 거룩함의 모범으로 제시해 주셨다”며 그녀의 시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2016년 9월 4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현대 영성의 현장 · 마더 데레사와 인도 캘커타(1)

환상과 현실의 엄청난 거리를 넘어서



사랑의 혁명 그 시작


1948년, 캘커타의 로레토 수녀원 고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던 유고슬라비아의 농가 출신인 수녀 데레사는 아름다운 정원, 발랄한 여학생들, 친근한 동료 그리고 안정된 생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인도에 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부르심을 받아 떠나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로레토 수녀원을 떠난다는 것은 그녀가 수녀가 되기 위하여 가족과 조국을 떠났던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수녀원에서 누렸던 물질적 안정에 대한 기억들아 그녀를 괴롭혔다. 그때 데레사 수녀는 이렇게 기도했다.


“오 주여, 저는 자유로운 선택과 당신의 사랑으로 여기 머물며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의 이웃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안전은 저의 안전이며, 그들의 건강 또한 저의 건강입니다. 저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이며, 저의 집은 붙잡힐까 봐 두려워서, 먼지가 두려워서, 병균과 온갖 질병이 뒤범벅이 되어 아무도 접근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입을 옷이 없어서 집을 나서지 못하여 기도하러 갈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더 이상 기운이 없어 아무 것도 먹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 주위를 왔다갔다 하건만 아무런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이재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어 울지 못하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천한 사람들의 집입니다.”


그리고 데레사 수녀는 캘커타의 가장 비참한 동네의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들 속에 뛰어들어 그곳에 버려진 아이들을 품에 안음으로써 그녀가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그리스도를 만나기 시작한다.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실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은 불평등과 무관심, 불의와 폐쇄 사회였던 ‘문제의 땅’ 인도 전역을 뒤흔든 ‘사랑의 충격’이었다. 아니 온 세상을 놀라게 한 가장 크고, 가장 어려운 혁명, ‘사랑의 혁명’의 시작이었다.



인도인들조차 모르겠다는 인도


‘천의 얼굴을 가진 불가사의한 땅’, 인도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말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인도인들은 상류계급, 상위 카스트 출신으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의 모든 이익을 움켜쥐고 있는 이들이다. 이런 선전에 기초한 외부인이 지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인도를 이해하고 심지어 동경하게 됨은 당연하다 하겠다. 인도 인구는 현재 10억에 이르고 있다. 인구의 절대 다수, 85퍼센트는 힌두교인이다. 그 외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무수한 군소 종교 집단이 있고 그리스도교 신자는 인구의 1.2퍼센트 정도뿐이다. 여기에 문맹률이 70퍼센트, 절대 빈곤의 생활을 해야만 하는 인구가 30퍼센트를 차지한다. 인도에서는 정확한 통계가 불가능하고 이러한 통계에 대하여 식자층 또는 상위 계급의 사람들일수록 애써 축소하려 한다.


인도에서 상류 계급은 절대 다수인 무지한 힌두인들의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다수의 횡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현상의 민주주의가 나타난다. 이 와중에 더욱 고통 받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뿐이다. 그들은 전생의 업 때문에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그들 스스로 믿고 그렇게 훈련되어왔다. 자신들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뿌리 깊은 종교 의식, 사회 문화의 견고한 제한 때문이다. 실례로 그들은 하고 저축을 싶어도 통장조차 만들 수 없다. 은행은 보증 없이는 구좌를 열어 주지도 않는다. 인도에서 가난이란 죽음보다 더한 저주, 그것이다.


일반인들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관심이라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힌두에서 정의, 도덕, 평등이란 우리의 개념과 엄청난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정의란 자신이 타고난 운명, 직업에 순명함(Dharma)이며, 평등이란 자신들의 업(karma)에 따라 자신들이 있게 된 것이라는 체념이고, 도덕이란 곧 다르마와 카르마에 충실함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마더 데레사의 활동


데레사 수녀가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 전재산은 5루피였다. 5루피는 지금 우리 돈으로 약 150원 정도로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이 빵 한 조각으로 두 끼는 때울 수 있는 돈이다. 데레사 수녀는 도시 근교 빈민촌의 어떤 거리에서부터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어린이와 병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학령기가 지났지만 전혀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 아니 어느 학교에서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그런 아이들에게 뱅갈리 문자와 알파벳, 그리고 어떻게 몸을 씻는 것인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며칠 뒤 데레사 수녀가 가르치던 로레토 수녀원 고등학교에서 두세 명의 소녀가, 또 며칠 뒤에는 소문을 듣고 로레토 수녀원에서 교사 몇 사람이 찾아와 돌보는 일을 거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공동체는 지금 인도의 캘커타뿐만 아니라 전세계 68개국에 퍼져 있고 수많은 수녀, 수사, 자원 봉사자들이 70여 개의 어린이들을 위한 ‘빈민 학교’와 2백 60개의 병원과 진료소, 58개의 ‘나환자 수용소’, 32개의 ‘죽음을 기다리는 집’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원 봉사자 가운데는 인도 여행 때 캘커타의 상황에 충격을 받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에 헌신하고 있는 의사,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저는 예수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막 대학을 마치고 온 한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규칙(사랑의 선교회)에 따라 선교회에 입회한 바로 다음날 ‘죽음을 기다리는 집’으로 가게 되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집’(Home for Dying Destitues) 또는 ‘임종의 집’은 캘커타를 비롯 인도 전역에 버려져 돌보는 이 없이 죽어 가는 이들을 데려다 어머니처럼 돌보아 평안히 임종하도록 해주는 곳이다. 3시간쯤 지난 후 돌아온 그 자매가 얼굴에 미소를 함빡 머금은 채 마더 데레사의 방으로 들어왔다. “3시간 동안 저는 예수님의 몸을 만졌답니다.” 데레사 수녀가 물었다. “무엇을?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녀는 대답했다. “사람들이 길에서 한 남자를 데려왔는데, 온몸에 구더기가 들끓었습니다. 그의 몸을 만지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지만, 저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계속했다. “등살이 그대로 땅에 떨어져 등에 있는 뼈가 다 떨어져 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거리에서 데려온 한 남자를 소독하고 씻겼을 때, 그때만큼 그리스도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랑의 선교 - 가난 곧 자유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동료들은 가난한 삶을 갈망한다. 그들에게 가난이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정 가난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가난’(여기서 가난이란 인간의 기본적 품위마저 유지할 수 없는 절대적 빈곤, 비참함을 의미한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의 선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왜 가난이 자유와 용기를 주는 원천인지를 이해하게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즉 그리스도의 가난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도움과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배고프신 그리스도, 버려진 그리스도, 외로운 그리스도, 말벗이 필요한 그리스도, 사랑에 굶주린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데레사 수녀는 늘 강조하여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진정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인도 땅 캘커타였을까?


왜 하필 인도 땅 캘커타였을까? 그녀의 혁명이 시작된 곳이. 그것은 인도가 안고 있는 무수한 문제 때문일 것이다. 인도는 카스트 제도에 기인한 뿌리 깊은 계급 의식, 계급간의 갈등과 적대감, 언어 문제, 인종간의 갈등, 종교 신앙간의 충돌, 지역간의 분쟁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은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데레사 수녀의 할 일. 그래서 사랑의 혁명은 인도 땅 캘커타에서 필요했다.


그녀로 인하여 인도 땅 안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수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인디라 간디 수상마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그런 일들을 데레사 수녀는 해냈다.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뿌리 깊은 종교적 타성마저 뛰어넘어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거대한 힌두 문화를 그 근본 뿌리에서부터 흔들고 있는 것이다. 단지 사랑의 실천 하나만으로. 그렇다. 이 시대의 성인이란 토마스 머튼의 말처럼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 삶으로 진정 소중한 무엇을 깨닫게 하여 보여 주는 이”, 바로 인도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이다. [경향잡지, 1994년 5월호]


 

현대 영성의 현장 · 마더 데레사와 인도 캘커타 (2)

묵묵히 실천함으로써 모든 것을 말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러고 감동적이다.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숙연해지고 눈시울이 몇 번씩 뜨거워지는 감격을 만난다. 그녀의 삶 자체가 메아리로 울려오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 선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묵묵히 그녀의 길을 걸어 갈 뿐이다. 데레사 수녀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영신적인 힘과 용기의 원천인 미사에서는 물론, 치료를 받아야 할 고통 중의 모든 영혼 안에서……. 제대 위의 예수와 길가의 벗들, 그들은 바로 똑같은 주님으로 데레사 수녀에게 자리한다.


데레사 수녀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계명은 구별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명이다. 그녀에게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게 하는 열쇠는 결코 형이상학적 윤리적 설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결코 사회 사업가가 아니다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그들의 일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업은 그분의 방법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확산하기 때문이다. 어느 힌두교인이 그들의 사회 사업과 사랑의 선교회가 실천하는 봉사가 똑같이 같은 사회 사업이라고 했을 때, 데레사 수녀는 분명히 이 둘을 구분하였다. 데레사 수녀는 자신들의 일이 사회 사업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동료들에게 말한다. 그녀의 말처럼 선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명랑한 고난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라 기꺼이 고통받기를 선택한 것이다. “항상 웃으면서 살아갑시다. 일을 위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있었던가?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 안에서…… 종교와 종교의 벽을 넘어 사랑의 일치 안에서 한 줄의 글, 한마디의 설교도 없이 그리스도를 이렇게 증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직접 그녀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인이다. 우리는 사회 사업가도, 교사도 간호사도 의사도 아니다. 우리는 신앙의 자매들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 계시는 예수께 봉사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목숨까지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자 한다. 그분 없이는 우리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설명해 주신다. 그분은 우리 삶의 이유요 의미다. 우리의 전부다.”



와서 보라!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형편없는 초상화를 억지로 그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마더 데레사 스스로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이 아무런 설명이나 말없이 침묵 속에서 다만 밝은 얼굴로 그들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깊은 웅변인가를 될 느끼게 것이다. 그들의 일은 너무나 분명하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일이 결코 자선이나 도움의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사랑의 실천이냐고 묻는다면 더욱 침묵하리라. 그들은 지금 배고픈, 상처받은, 죽어가는 문둥이로 가면을 쓰고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뿐이다. “말은 거의 하지 마십시오. 침묵 속에서 행하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빗자루를 들고 남의 집 앞을 청소해 보십시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마더 데레사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을 기쁘게 주는 사람”이다. 또한 “타인의 고통을 - 그가 우리와 다른 신앙, 가치, 문화를 갖고 있는 전혀 별개의 사람들일지라도 - 함께하는 이”를 의미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진정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또한 용서받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용서받아야 한단 말인가? 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아픔의 원인은 곧 우리들이가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 가야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보살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나누어 주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우리가 한 조각의 빵을 나누어 주고 한 벌의 옷을 제공해야 하는 하느님 구원의 손으로서 사랑의 도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평화를 위하여 대포나 폭탄이 결코 필요하지 않다. 매일 우리가 간청하는 사랑과 자비가, 기쁨과 기쁨이 가져다 주는 ‘이해 깊은 사랑’이 요청될 뿐이다. 이 사랑은 또한 겸손을 요구한다. 우리가 겸손하게 살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함께 나누는 고통”, 데레사 수녀는 이것을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데레사 수녀에게 고통이란 더욱 위대한 사랑과 더욱더 큰 관용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고통이 없다면 그들의 일은 단순한 사회 사업 혹은 단순한 선행이나 도움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통은 함께 받아들이고 함께 참아 낸다면 바로 기쁨인 것이다.”



교회는 바로 당신과 나


“예수님이 교회의 주님이라면, 교회는 더 모범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묻는 물음에 데레사는 되묻는다. “그러나 교회는 누구입니까? 당신과 나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궁전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만이 궁전을 필요로 합니다.” 그녀의 태도는 분명하고 단호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입니다. 각 사람 하나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시고, 그 순간에 그 한 사람은 오직 그 한 분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특별한 성소


“부자들에게 관대한 수도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들의 특별한 성소는 한 사람 한 사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실재가 된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대중을 보살피지 않습니다. 더 큰일에 봉사하는 성소는 다른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완벽한 지시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자발적으로 한 사람 한사람에게 봉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사회 구조를 개조하라고 요구하신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하느님 사이의 문제일 뿐. 우리는 명목이야 어떻든 한 사람 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일은 사회 조직에 관한 일도 아니며, 무엇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가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


‘총체적 부패 구조’라고 말해지는 우리 사회! 우리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가? 물질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영혼의 굶주림으로, 삶의 좌표를 상실하고, 자식들로부터 버려진 우리들의 어버이들, 부모들로부터 버려져 울고 있는 어린 생명들. 그러나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가난한 이들에게 교회는 사치스러운 호텔, 백화점, 고급 레스토랑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너무나 많은 신자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서부터 회의적이다. 정직한 영혼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정치 사회적 어두움 그 자체였던 불우했던 1970~80년대보다 더한 도전이 우리 앞에 있건만 교회는 문제를 제대로 인식이라도 하고 있는가? 도덕과 양심을 운운하는 것은 이 땅의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위선을 덮씌우는 상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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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다만 행함으로! 설천으로! 함께 나누어라! 기꺼이 빚투성이가 될지라도. 죽기까지 다 내어 주셨던 그분처럼. 설천 속에서만이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 하는 ‘영성’이 도대체 무엇인지 스스로 대답하리라. 보라! 누가 누구를 진정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상처가 이토록 깊다. 영혼들이 바라는 단 하나 침묵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 진정 가난한 교회이다. 말 그대로 교회는 가난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본연의 영성에 눈을 떠야 할 때다. 이 길만이 교회가 이 시대에 정확히 응답하는 하나의 모습이다.


“가난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이 시대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만이라도 진정 가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이 땅의 젊은이 그 누구도 설교에, 명언에 더 이상 감명되지 않는다.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교육될 수 있는지 몰라도 사랑만은 가르쳐지지 않는다. 사랑은 오직 삶으로만 대답될 뿐이다. 성직자마저 또 하나의 거짓말쟁이가 된다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필요한 이에게는 기꺼이 다 내주어야 한다. 그분이 그러하셨듯이. 말없이 사랑하는 것만이 이 시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잣대이다.


“사랑하십시오. 사람들 속에 있는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들 속에 있는 예수께 봉사하십시오. 희생될 때까지 사랑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써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면,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소박하게 살아가십시오. 진정 가난하게 살아가십시오.”


[경향잡지, 1994년 6월호] 오장균 가브리엘(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



 

그녀는 하늘에서 나지 않았다 - 마더 데레사의 어린 시절

로버트 세루


마케도니아 지방 스코프예에서 태어난 공사(Gonxha Agnes Bojaxhill, 1910년 8월 27일 출생), 그가 마더 데레사다. 공사의 집안은 알바니아 출신으로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아니어서 늘 생활이 불안정했지만, 아버지 니콜라는 건축업자로서 기반을 잡아갔다. 마케도니아 지방은 일찍이 수많은 민족들의 각축장이 돼왔고, 민족적인 저항운동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공사가 세 살 때 발칸 전쟁이 발발하여, 그 지방은 투르크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로 나누어졌다. 나찌 치하에서 불가리아에 합병되고, 2차대전 후엔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 이 지역은 인종과 종교의 전시장이었다.


인구의 37%인 가톨릭 신자들은 주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방에 모여 사는데, 아주 오랜 전통 신앙에 집착해 있다. 공사도 그러한 분위기 안에서 자라났다. 그곳 신학교에서는 아직도 외출이 금지돼있을 정도다. 공사는 다섯 살 위인 언니 아가와 많이 닮았는데, 두 자매는 특히 음악을 좋아하여 성가대의 주축이 되었었다. 언니는 공사보다 매우 지성적이고 책을 좋아했는데, 나중에 어머니와 함께 알바니아로 가 살았다. 2차대전 후에는 신문기자와 방송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1968년에 돌아가신 후 3년 만에 언니도 세상을 떠났다. 다른 형제들도 다 어려서 죽고, 지금 일흔세 살인 오빠 라자르가 이탈리아에 살고 있어, 가끔 동생인 마더 데레사를 만난다. 오빠의 추억을 통해, 마더 데레사의 어린 시절을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 부모님들께서 결혼하시던 1900년쯤에 알바니아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 애국자였던 아버지는 그곳에서는 물론 스코프예로 이사한 후에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늘 외세의 지배를 겪으면서도 똘똘 뭉쳐 우리 고유의 언어와 전통을 지켜왔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가톨릭을 신봉해왔었다. 아버지는 좀 정치적인 인물이었지만, 어머니는 보다 종교적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발치를 따라다닐 때, 누이들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책이나 잡지에서는 마더 데레사를 농민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건 완전히 잘못된 얘기다. 아버지는 친구와 함께 건설회사를 경영하여 성공을 거두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집은 형편이 좋았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우리 집은 언제나 손님들로 꽉 차있었다. 알바니아의 민족주의자들과 정치 동료들이 늘 찾아왔다. 항상, 외세의 지배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얘기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한 정치집회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속이 아프다면서 쓰러져 곧 피를 흘리셨다. 급히 병원으로 모시고 갔지만 응급실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불과 몇 시간의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독살되었다고 확신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밤새에 모든 것을 뒤바꾸어 버렸다.


그때 공사는 아홉살이었다. 어머니께서 안 계셨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편안히 살아오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우리들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기 위해, 어머니는 바느질을 시작하셨다. 조용한 어머니는 어떠한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만큼이나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단 한 가지 중요한 일은 ‘교회’였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매우 진지했고 또 엄격하면서도 적극적이었다. 우리는 기도 모임을 만들고, 성모의 날 행사 등 특별한 예식을 지냈다. 우리는 성당 근처에서 살았는데, 그곳엔 알바니아인 사제가 있었다. 어머니와 나의 누이들은 흔히 성당에서 살았던 것 같다. 우리들은 모두 성가대 일이나 전례 나아가서는 전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다.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 즈음에는, 영성체를 하기 전에,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하는 공심재를 지켜야 했다. 언젠가 토요일 밤 어린 나는 목이 말라 잠이 깨어 물을 한 잔 마셨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공심재 생각이 났다. 곧바로 어머니께 달려가 내가 저지른 잘못을 눈물로 고백했다. 어머니는 매우 심각하게 타이르시고 나서는 다음날 나를 신부님께 데리고 가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나는 영성체를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느꼈던 ‘거룩한 공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요즘 영성체하려 나가는 사람들과 비교해보라.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우리 집은 정치논쟁의 온상이었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는 하나의 수도원 같았다. 이것이 바로 공사가 오늘의 데레사 수녀가 된 이유이다. 우리 어머니는 비범하리만큼 신심이 두터웠고, 그 딸들은 언제나 성당에서 활동하며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은 늘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힘썼다. 어머니는 그곳 불쌍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먹여 살리며, 그들을 도와주면서 늘 전교에도 열성을 보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온 몸이 종창으로 뒤덮인 어떤 부인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 가족들마저 마다하는 그녀를 우리 집으로 데려와 어머니는 그녀가 다 나을 때까지 정성을 다해 돌보아주었다. 오늘의 데레사 수녀는 거저 하늘에서 난 것이 아니다.


내가 집을 떠날 때 공사는 열세 살이었는데, 그녀가 열여덟 살 되던 해 수녀원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서 6년간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수녀원에 들어가겠다는 공사의 펀지를 받고는 무척 당황하였다. 그건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누이동생은 언제나 생기가 넘쳐 활달하고 건강하며 예쁜 소녀였다. 나는 공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어떻게 너 같은 소녀가 수녀가 되겠다고 하니? 네 스스로 무덤에 들어간다는 것을 모르고 있니?” 그 전에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었다. 그때 나는 알바니아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한 다음 막 중위로 진급되어, 자부심을 갖고 있던 때였다. 공사는 내게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그 대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오빠는 2백만 국민의 왕을 섬기는 장교로서 스스로를 중요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저도 역시 전세계의 왕을 섬기는 장교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누가 옳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집안의 배경과 분위기를 생각해보며 그녀의 결단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열두어 살 때부터 벌써 선교사업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외지에서 선교사로 일하다 돌아온 신부님들을 만나, 공사는 그 체험담을 즐겨 들었다. 그녀는 자세한 얘기들까지도 다 기억해 두는 것 같았다. 공사가 열두어 살 때쯤, 예수회원이었던 본당신부가 선교지역이 표시된 세계지도를 꺼내놓자, 공사가 지도 앞으로 걸어나가 선교사들의 정확한 위치와 그 활동 등을 낱낱이 설명하여 거기 모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본당신부는 그녀의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었고 공사는 결국 본당신부와 교분이 있던 로레토 수녀회에 들어갔다.


우리들이 집에서 그렇게 살아온 신앙규율은 데레사 수녀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의 선교회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매우 엄격한 수도회다. 나는 마더 데레사에게 이렇게 얘기한 일이 있다. “너는 분명히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 같애. 꼭 어떤 군사기지나 함대의 사령관 같다.”


어머니에게서처럼 그녀에게도 엄청난 강인함이 보인다. 어린 딸을 그토록 멀리 떠나보내 수녀가 되게 한다는 것은 어머니에게도 커다란 희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다시 공사를 보지 못했다. 공사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두 모녀의 결단은 옳았다. (Catholic Digest에서 옮김) [경향잡지, 1981년 6월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내가 만난 마더 데레사 수녀

"사랑의 등불을 켜서 어두워가는 세상 밝혀야"


- 김 추기경이 한국을 처음 방문한 마더 데레사 수녀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1981. 5. 3~6)




'살아있는 성녀의 보디가드 김 추기경'


1981년 5월3일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방한하셨다. 그날 오후 공항으로 수녀님을 마중 나갔는데 어찌나 인파가 많이 몰렸던지 팔자(?)에도 없는 경호원 노릇을 해야 했다. 수녀님을 감싸 안다시피하고 인파를 헤치면서 공항을 빠져 나가는 내 모습을 보고 한 신문기자가 '보디가드 김 추기경'이라고 썼다. 물밀듯 밀려드는 기자들과 환영객을 막지 않으면 70세가 넘은 150㎝ 단신 수녀님이 다치실 것만 같아 보디가드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한국에 머문 3박4일 동안 우리 가슴에 '사랑의 불'를 놓았다. 가는 곳마다 감동적 연설로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 대한 사랑을 역설하셨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후부터 '살아있는 성녀', '빈자(貧者)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터라 신문방송사 취재경쟁도 대단했다. 기자들은 수녀님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보도하면서 전국에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다음날 서강대 강연장으로 가는 도중 신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수녀님이 하마터면 다칠 뻔했다. 그래서 마이크를 잡고 "오늘 우리는 데레사 수녀님 사랑에 취한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열기를 식혔다. 그때 사람들이 며칠 동안 수녀님을 모시고 다닌 나를 꽤나 부러워했을 게다. 어디를 가건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그분 옷자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어 아우성이었으니 말이다.


데레사 수녀님은 본래 카메라 플래시를 무척 싫어하는 분이다. 그런데도 기자들이 몸을 부딪히면서 플래시 세례를 퍼부어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으셨다. 언제 어디서건 주름 패인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가까이서 뵙건대 누구에게 보일려고 짓는 미소가 결코 아니었다. 들은 얘기지만 수녀님은 "카메라 플래시를 거부하지 않을 테니 그때마다 연옥영혼을 한명씩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청했다고 한다. 대구 희망원에 내려가셨을 때 그 얘기가 화제에 올랐는데 수녀님이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연옥이 텅텅 비었을 것"이라고 농담을 던져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데레사 수녀님은 한국 첫 방문이셨다. 그러나 난 이미 그 전에 호주 맬버른 세계성체대회에서 그분의 명성과 열정을 확인했다. 그때 야외 강연회에서 들은 생명존중 메시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늘에는 별이 많아서 아름답습니다. 들판도 꽃이 많이 필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 세상도 어린이가 많을 때 아름답습니다. 하늘에 별이 많다고, 들에 꽃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왜 어린 생명이 우리 삶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불평하면서 낙태를 합니까?"


데레사 수녀님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사신 분이다. 가난·불평등·전쟁 등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의 궁극적 해답을 갖고 계셨다. 사람들이 수녀님을 보고 열광한 이유도 그 해답,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녀님은 서강대 강연회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굶주림은 먹을 것에 대한 굶주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헐벗음은 옷을 걸치지 못한 헐벗음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굶주림과 인간 존엄성이 벗겨진 상태의 헐벗음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걱정해야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 속에서 가난하게 사셨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후 가난한 이들과 부대끼면서 살고 싶은 열망에 몸살을 앓았으나 하느님께서 그 길로 이끄신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오랜 번민 끝에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에는 내가 과연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가난하게 살면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자신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어 주춤했다. 그러다 주교로 임명돼 망설임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주교직도 하느님의 부르심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데레사 수녀님이 증거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 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다. 그분이 들었던 '사랑의 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안다. 문제는 그 사랑을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하느냐이다. 모든 사람이 데레사 수녀님처럼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큰 사랑만 있는 게 아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해주고, 옆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 한번 지어 보이는 것도 사랑이다. 마음에서 미움을 털어버리고 화해하는 것도 사랑이다. 그런데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나 역시도 일본에 대해 미움 정도가 아니라 적개심을 품었던 때가 있다. 외국에 그렇게 드나들면서도 일본항공(JAL)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일제 물품은 방에 들여놓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한 국가를 그토록 미워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서 미움과 증오를 씻어 달라고 말이다. 하느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