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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다의 성녀 마더 데레사


콜카다의 성녀 마더 데레사 (Saint Mother Teresa of Kolkata)



축 일 : 9월 05일

신 분 : 수녀,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 지역 : 인도 콜카다(Kolkata of India) 구. 캘커타

활동 년도 : 1910-1997년

같은 이름 : 테레사, 테레시아



성녀 마더 테레사(Mother Teresia, 또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터키가 점령 중이던 알바니아(Albania)의 스코페(Skopje)에서 알바니아계인 아버지 니콜라 보약스히야(Nikola Bojaxhiu)와 어머니 드라네 보약스히야(Drane Bojaxhiu)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다음날 곤히아 아녜스(Gouxha Agne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녀가 태어난 지 2년 뒤인 1912년 알바니아는 터키로부터 독립했지만 스코페는 여전히 알바니아의 영토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스코페는 세르비아를 모태로 탄생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한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이다.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신심 깊은 어머니로부터 철저히 신앙교육을 받은 그녀는 9살 때 건축업자였던 아버지를 갑자기 여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소녀 시절부터 성인전과 선교사들의 이야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18세 되던 1928년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평소 선교에 대해 갖고 있던 관심이 자신을 수도성소에로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예수회원인 본당신부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그 해 11월 29일 인도의 콜카타에서 전교 중인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의 로레토 수녀회(Sisters of Loreto)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더블린에서 집중적으로 영어를 공부한 후 1929년 인도(India)에 도착하여 히말라야 산맥 근처에 있는 다르질링(Darjiling)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1931년 5월 24일 첫 서원을 하면서 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된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의 이름을 자신의 수도명으로 택했다. 그 후 7년간 테레사 수녀는 로레토 수녀회가 운영하는 콜카타(옛 지명은 캘커타, Calcutta)의 성모여자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1937년 5월 24일 그녀는 종신서원을 했고, 1944년에는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46년 9월 10일 연례 피정 참석차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테레사 수녀는 그녀 스스로 후에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 묘사한 놀라운 체험을 했다. 그녀는 수도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속에 살며 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소명을 들은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교황청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1948년 수도회 밖에서 수도자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전통적인 서구식 수녀복장이 아닌 인도 여성들이 평상복으로 입는 사리를 수도복으로 택한 그녀는 우선 성가정 병원에서 속성으로 기초 간호학을 이수한 후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 19일 성모여자고등학교 출신 제자인 슈바시니 다스가 찾아와 아직 형성되지도 않은 수도회에 받아주길 간청해 첫 지원자로서 마더 테레사와 합류했다. 그리고 1950년 10월 7일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살고자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가 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처음부터 함께한 12명의 회원들이 수련기를 시작했다. 1952년 8월 22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정원까지 아픈 이들로 꽉 들어찼다. 1953년 사랑의 선교회 본원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빈민굴의 고아들을 위한 집과 콜카타 외곽에 나환자들을 위한 자립 센터도 열었다.


1965년 2월 1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사랑의 선교회가 세계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었다. 교구 설립 수도회로서 지역 주교의 관할 안에서만 활동하던 사랑의 선교회가 이제는 세계 어디서나 선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이미 사랑의 선교회에는 3백여 명의 수녀들이 여러 개의 시설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베네수엘라(Venezuela)에 해외 첫 분원을 연 이후 아프리카, 호주, 유럽 등 여러 대륙에 진출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더 테레사의 적극적 후원자가 되어 그녀가 선교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바티칸 시민권을 수여했다. 이렇게 해서 1971년에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 50여 개의 분원을 갖게 되었다.


1969년 3월 26일 ‘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회칙을 인가 받아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협조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사랑의 선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마더 테레사와 사랑의 선교회 활동이 세계 곳곳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여러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1979년 12월 10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더 테레사는 그 상을 자신이 온 삶을 바쳐 섬기고 사랑한 가난한 이들의 이름으로 받았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후 사랑의 선교회는 더욱 놀라운 속도로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1970년 이후 마더 테레사는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고 사회 복귀를 돕는 치료 센터를 여러 곳에 열었다. 또한 나환자 병원과 나환자들을 위한 재활 및 사회 복귀 시설을 운영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호 시설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그리고 결핵 환자들과 영양실조 걸린 이들을 위한 치료소 및 요양소들도 설치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활동도 시작했다.



1990년 4월 16일 마더 테레사는 건강을 이유로 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같은 해 9월 총장직에 다시 선출되었다. 1997년 9월 5일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며 세계 모든 이들의 영적 어머니인 마더 테레사는 87세를 일기로 콜카타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선종 소식에 종교와 이념, 민족과 인종을 초월해 전 세계가 한결같이 ‘인류의 참 어머니’를 잃었다며 애도하였다.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살아서부터 ‘성녀’로 추앙받았던 마더 테레사 수녀의 시복식을 선종 6년 만에 거행했다. 교황은 30여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마더 테레사를 새로운 거룩함의 모범으로 제시해 주셨다”며 그녀의 시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2016년 9월 4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현대 영성의 현장 · 마더 데레사와 인도 캘커타(1)

환상과 현실의 엄청난 거리를 넘어서



사랑의 혁명 그 시작


1948년, 캘커타의 로레토 수녀원 고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던 유고슬라비아의 농가 출신인 수녀 데레사는 아름다운 정원, 발랄한 여학생들, 친근한 동료 그리고 안정된 생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인도에 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부르심을 받아 떠나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로레토 수녀원을 떠난다는 것은 그녀가 수녀가 되기 위하여 가족과 조국을 떠났던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수녀원에서 누렸던 물질적 안정에 대한 기억들아 그녀를 괴롭혔다. 그때 데레사 수녀는 이렇게 기도했다.


“오 주여, 저는 자유로운 선택과 당신의 사랑으로 여기 머물며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의 이웃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안전은 저의 안전이며, 그들의 건강 또한 저의 건강입니다. 저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이며, 저의 집은 붙잡힐까 봐 두려워서, 먼지가 두려워서, 병균과 온갖 질병이 뒤범벅이 되어 아무도 접근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입을 옷이 없어서 집을 나서지 못하여 기도하러 갈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더 이상 기운이 없어 아무 것도 먹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 주위를 왔다갔다 하건만 아무런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이재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어 울지 못하는 사람들의 집입니다. 저의 집은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천한 사람들의 집입니다.”


그리고 데레사 수녀는 캘커타의 가장 비참한 동네의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들 속에 뛰어들어 그곳에 버려진 아이들을 품에 안음으로써 그녀가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그리스도를 만나기 시작한다.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실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은 불평등과 무관심, 불의와 폐쇄 사회였던 ‘문제의 땅’ 인도 전역을 뒤흔든 ‘사랑의 충격’이었다. 아니 온 세상을 놀라게 한 가장 크고, 가장 어려운 혁명, ‘사랑의 혁명’의 시작이었다.



인도인들조차 모르겠다는 인도


‘천의 얼굴을 가진 불가사의한 땅’, 인도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말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인도인들은 상류계급, 상위 카스트 출신으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의 모든 이익을 움켜쥐고 있는 이들이다. 이런 선전에 기초한 외부인이 지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인도를 이해하고 심지어 동경하게 됨은 당연하다 하겠다. 인도 인구는 현재 10억에 이르고 있다. 인구의 절대 다수, 85퍼센트는 힌두교인이다. 그 외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무수한 군소 종교 집단이 있고 그리스도교 신자는 인구의 1.2퍼센트 정도뿐이다. 여기에 문맹률이 70퍼센트, 절대 빈곤의 생활을 해야만 하는 인구가 30퍼센트를 차지한다. 인도에서는 정확한 통계가 불가능하고 이러한 통계에 대하여 식자층 또는 상위 계급의 사람들일수록 애써 축소하려 한다.


인도에서 상류 계급은 절대 다수인 무지한 힌두인들의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다수의 횡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현상의 민주주의가 나타난다. 이 와중에 더욱 고통 받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뿐이다. 그들은 전생의 업 때문에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그들 스스로 믿고 그렇게 훈련되어왔다. 자신들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뿌리 깊은 종교 의식, 사회 문화의 견고한 제한 때문이다. 실례로 그들은 하고 저축을 싶어도 통장조차 만들 수 없다. 은행은 보증 없이는 구좌를 열어 주지도 않는다. 인도에서 가난이란 죽음보다 더한 저주, 그것이다.


일반인들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관심이라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힌두에서 정의, 도덕, 평등이란 우리의 개념과 엄청난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정의란 자신이 타고난 운명, 직업에 순명함(Dharma)이며, 평등이란 자신들의 업(karma)에 따라 자신들이 있게 된 것이라는 체념이고, 도덕이란 곧 다르마와 카르마에 충실함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마더 데레사의 활동


데레사 수녀가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 전재산은 5루피였다. 5루피는 지금 우리 돈으로 약 150원 정도로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이 빵 한 조각으로 두 끼는 때울 수 있는 돈이다. 데레사 수녀는 도시 근교 빈민촌의 어떤 거리에서부터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어린이와 병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학령기가 지났지만 전혀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 아니 어느 학교에서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그런 아이들에게 뱅갈리 문자와 알파벳, 그리고 어떻게 몸을 씻는 것인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며칠 뒤 데레사 수녀가 가르치던 로레토 수녀원 고등학교에서 두세 명의 소녀가, 또 며칠 뒤에는 소문을 듣고 로레토 수녀원에서 교사 몇 사람이 찾아와 돌보는 일을 거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공동체는 지금 인도의 캘커타뿐만 아니라 전세계 68개국에 퍼져 있고 수많은 수녀, 수사, 자원 봉사자들이 70여 개의 어린이들을 위한 ‘빈민 학교’와 2백 60개의 병원과 진료소, 58개의 ‘나환자 수용소’, 32개의 ‘죽음을 기다리는 집’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원 봉사자 가운데는 인도 여행 때 캘커타의 상황에 충격을 받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에 헌신하고 있는 의사,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저는 예수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막 대학을 마치고 온 한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규칙(사랑의 선교회)에 따라 선교회에 입회한 바로 다음날 ‘죽음을 기다리는 집’으로 가게 되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집’(Home for Dying Destitues) 또는 ‘임종의 집’은 캘커타를 비롯 인도 전역에 버려져 돌보는 이 없이 죽어 가는 이들을 데려다 어머니처럼 돌보아 평안히 임종하도록 해주는 곳이다. 3시간쯤 지난 후 돌아온 그 자매가 얼굴에 미소를 함빡 머금은 채 마더 데레사의 방으로 들어왔다. “3시간 동안 저는 예수님의 몸을 만졌답니다.” 데레사 수녀가 물었다. “무엇을?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녀는 대답했다. “사람들이 길에서 한 남자를 데려왔는데, 온몸에 구더기가 들끓었습니다. 그의 몸을 만지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지만, 저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계속했다. “등살이 그대로 땅에 떨어져 등에 있는 뼈가 다 떨어져 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거리에서 데려온 한 남자를 소독하고 씻겼을 때, 그때만큼 그리스도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랑의 선교 - 가난 곧 자유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동료들은 가난한 삶을 갈망한다. 그들에게 가난이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정 가난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가난’(여기서 가난이란 인간의 기본적 품위마저 유지할 수 없는 절대적 빈곤, 비참함을 의미한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의 선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왜 가난이 자유와 용기를 주는 원천인지를 이해하게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즉 그리스도의 가난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도움과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배고프신 그리스도, 버려진 그리스도, 외로운 그리스도, 말벗이 필요한 그리스도, 사랑에 굶주린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데레사 수녀는 늘 강조하여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진정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인도 땅 캘커타였을까?


왜 하필 인도 땅 캘커타였을까? 그녀의 혁명이 시작된 곳이. 그것은 인도가 안고 있는 무수한 문제 때문일 것이다. 인도는 카스트 제도에 기인한 뿌리 깊은 계급 의식, 계급간의 갈등과 적대감, 언어 문제, 인종간의 갈등, 종교 신앙간의 충돌, 지역간의 분쟁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은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데레사 수녀의 할 일. 그래서 사랑의 혁명은 인도 땅 캘커타에서 필요했다.


그녀로 인하여 인도 땅 안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수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인디라 간디 수상마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그런 일들을 데레사 수녀는 해냈다.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뿌리 깊은 종교적 타성마저 뛰어넘어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거대한 힌두 문화를 그 근본 뿌리에서부터 흔들고 있는 것이다. 단지 사랑의 실천 하나만으로. 그렇다. 이 시대의 성인이란 토마스 머튼의 말처럼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 삶으로 진정 소중한 무엇을 깨닫게 하여 보여 주는 이”, 바로 인도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이다. [경향잡지, 1994년 5월호]


현대 영성의 현장 · 마더 데레사와 인도 캘커타 (2)

묵묵히 실천함으로써 모든 것을 말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러고 감동적이다.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숙연해지고 눈시울이 몇 번씩 뜨거워지는 감격을 만난다. 그녀의 삶 자체가 메아리로 울려오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 선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묵묵히 그녀의 길을 걸어 갈 뿐이다. 데레사 수녀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영신적인 힘과 용기의 원천인 미사에서는 물론, 치료를 받아야 할 고통 중의 모든 영혼 안에서……. 제대 위의 예수와 길가의 벗들, 그들은 바로 똑같은 주님으로 데레사 수녀에게 자리한다.


데레사 수녀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계명은 구별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명이다. 그녀에게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게 하는 열쇠는 결코 형이상학적 윤리적 설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결코 사회 사업가가 아니다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그들의 일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업은 그분의 방법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확산하기 때문이다. 어느 힌두교인이 그들의 사회 사업과 사랑의 선교회가 실천하는 봉사가 똑같이 같은 사회 사업이라고 했을 때, 데레사 수녀는 분명히 이 둘을 구분하였다. 데레사 수녀는 자신들의 일이 사회 사업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동료들에게 말한다. 그녀의 말처럼 선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명랑한 고난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라 기꺼이 고통받기를 선택한 것이다. “항상 웃으면서 살아갑시다. 일을 위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있었던가?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 안에서…… 종교와 종교의 벽을 넘어 사랑의 일치 안에서 한 줄의 글, 한마디의 설교도 없이 그리스도를 이렇게 증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직접 그녀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인이다. 우리는 사회 사업가도, 교사도 간호사도 의사도 아니다. 우리는 신앙의 자매들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 계시는 예수께 봉사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목숨까지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자 한다. 그분 없이는 우리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설명해 주신다. 그분은 우리 삶의 이유요 의미다. 우리의 전부다.”



와서 보라!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형편없는 초상화를 억지로 그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마더 데레사 스스로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이 아무런 설명이나 말없이 침묵 속에서 다만 밝은 얼굴로 그들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깊은 웅변인가를 될 느끼게 것이다. 그들의 일은 너무나 분명하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일이 결코 자선이나 도움의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사랑의 실천이냐고 묻는다면 더욱 침묵하리라. 그들은 지금 배고픈, 상처받은, 죽어가는 문둥이로 가면을 쓰고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뿐이다. “말은 거의 하지 마십시오. 침묵 속에서 행하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빗자루를 들고 남의 집 앞을 청소해 보십시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마더 데레사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을 기쁘게 주는 사람”이다. 또한 “타인의 고통을 - 그가 우리와 다른 신앙, 가치, 문화를 갖고 있는 전혀 별개의 사람들일지라도 - 함께하는 이”를 의미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진정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또한 용서받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용서받아야 한단 말인가? 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아픔의 원인은 곧 우리들이가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 가야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보살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나누어 주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우리가 한 조각의 빵을 나누어 주고 한 벌의 옷을 제공해야 하는 하느님 구원의 손으로서 사랑의 도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평화를 위하여 대포나 폭탄이 결코 필요하지 않다. 매일 우리가 간청하는 사랑과 자비가, 기쁨과 기쁨이 가져다 주는 ‘이해 깊은 사랑’이 요청될 뿐이다. 이 사랑은 또한 겸손을 요구한다. 우리가 겸손하게 살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함께 나누는 고통”, 데레사 수녀는 이것을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데레사 수녀에게 고통이란 더욱 위대한 사랑과 더욱더 큰 관용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고통이 없다면 그들의 일은 단순한 사회 사업 혹은 단순한 선행이나 도움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통은 함께 받아들이고 함께 참아 낸다면 바로 기쁨인 것이다.”



교회는 바로 당신과 나


“예수님이 교회의 주님이라면, 교회는 더 모범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묻는 물음에 데레사는 되묻는다. “그러나 교회는 누구입니까? 당신과 나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궁전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만이 궁전을 필요로 합니다.” 그녀의 태도는 분명하고 단호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입니다. 각 사람 하나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시고, 그 순간에 그 한 사람은 오직 그 한 분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특별한 성소


“부자들에게 관대한 수도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들의 특별한 성소는 한 사람 한 사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실재가 된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대중을 보살피지 않습니다. 더 큰일에 봉사하는 성소는 다른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완벽한 지시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자발적으로 한 사람 한사람에게 봉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사회 구조를 개조하라고 요구하신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하느님 사이의 문제일 뿐. 우리는 명목이야 어떻든 한 사람 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일은 사회 조직에 관한 일도 아니며, 무엇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가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


‘총체적 부패 구조’라고 말해지는 우리 사회! 우리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가? 물질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영혼의 굶주림으로, 삶의 좌표를 상실하고, 자식들로부터 버려진 우리들의 어버이들, 부모들로부터 버려져 울고 있는 어린 생명들. 그러나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가난한 이들에게 교회는 사치스러운 호텔, 백화점, 고급 레스토랑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너무나 많은 신자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서부터 회의적이다. 정직한 영혼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정치 사회적 어두움 그 자체였던 불우했던 1970~80년대보다 더한 도전이 우리 앞에 있건만 교회는 문제를 제대로 인식이라도 하고 있는가? 도덕과 양심을 운운하는 것은 이 땅의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위선을 덮씌우는 상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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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다만 행함으로! 설천으로! 함께 나누어라! 기꺼이 빚투성이가 될지라도. 죽기까지 다 내어 주셨던 그분처럼. 설천 속에서만이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 하는 ‘영성’이 도대체 무엇인지 스스로 대답하리라. 보라! 누가 누구를 진정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상처가 이토록 깊다. 영혼들이 바라는 단 하나 침묵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 진정 가난한 교회이다. 말 그대로 교회는 가난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본연의 영성에 눈을 떠야 할 때다. 이 길만이 교회가 이 시대에 정확히 응답하는 하나의 모습이다.


“가난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이 시대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만이라도 진정 가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이 땅의 젊은이 그 누구도 설교에, 명언에 더 이상 감명되지 않는다.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교육될 수 있는지 몰라도 사랑만은 가르쳐지지 않는다. 사랑은 오직 삶으로만 대답될 뿐이다. 성직자마저 또 하나의 거짓말쟁이가 된다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필요한 이에게는 기꺼이 다 내주어야 한다. 그분이 그러하셨듯이. 말없이 사랑하는 것만이 이 시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잣대이다.


“사랑하십시오. 사람들 속에 있는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들 속에 있는 예수께 봉사하십시오. 희생될 때까지 사랑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써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면,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소박하게 살아가십시오. 진정 가난하게 살아가십시오.”


[경향잡지, 1994년 6월호] 오장균 가브리엘(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



그녀는 하늘에서 나지 않았다 - 마더 데레사의 어린 시절

로버트 세루


마케도니아 지방 스코프예에서 태어난 공사(Gonxha Agnes Bojaxhill, 1910년 8월 27일 출생), 그가 마더 데레사다. 공사의 집안은 알바니아 출신으로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아니어서 늘 생활이 불안정했지만, 아버지 니콜라는 건축업자로서 기반을 잡아갔다. 마케도니아 지방은 일찍이 수많은 민족들의 각축장이 돼왔고, 민족적인 저항운동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공사가 세 살 때 발칸 전쟁이 발발하여, 그 지방은 투르크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로 나누어졌다. 나찌 치하에서 불가리아에 합병되고, 2차대전 후엔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 이 지역은 인종과 종교의 전시장이었다.


인구의 37%인 가톨릭 신자들은 주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방에 모여 사는데, 아주 오랜 전통 신앙에 집착해 있다. 공사도 그러한 분위기 안에서 자라났다. 그곳 신학교에서는 아직도 외출이 금지돼있을 정도다. 공사는 다섯 살 위인 언니 아가와 많이 닮았는데, 두 자매는 특히 음악을 좋아하여 성가대의 주축이 되었었다. 언니는 공사보다 매우 지성적이고 책을 좋아했는데, 나중에 어머니와 함께 알바니아로 가 살았다. 2차대전 후에는 신문기자와 방송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1968년에 돌아가신 후 3년 만에 언니도 세상을 떠났다. 다른 형제들도 다 어려서 죽고, 지금 일흔세 살인 오빠 라자르가 이탈리아에 살고 있어, 가끔 동생인 마더 데레사를 만난다. 오빠의 추억을 통해, 마더 데레사의 어린 시절을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 부모님들께서 결혼하시던 1900년쯤에 알바니아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 애국자였던 아버지는 그곳에서는 물론 스코프예로 이사한 후에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늘 외세의 지배를 겪으면서도 똘똘 뭉쳐 우리 고유의 언어와 전통을 지켜왔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가톨릭을 신봉해왔었다. 아버지는 좀 정치적인 인물이었지만, 어머니는 보다 종교적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발치를 따라다닐 때, 누이들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책이나 잡지에서는 마더 데레사를 농민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건 완전히 잘못된 얘기다. 아버지는 친구와 함께 건설회사를 경영하여 성공을 거두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집은 형편이 좋았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우리 집은 언제나 손님들로 꽉 차있었다. 알바니아의 민족주의자들과 정치 동료들이 늘 찾아왔다. 항상, 외세의 지배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얘기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한 정치집회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속이 아프다면서 쓰러져 곧 피를 흘리셨다. 급히 병원으로 모시고 갔지만 응급실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불과 몇 시간의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독살되었다고 확신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밤새에 모든 것을 뒤바꾸어 버렸다.


그때 공사는 아홉살이었다. 어머니께서 안 계셨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편안히 살아오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우리들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기 위해, 어머니는 바느질을 시작하셨다. 조용한 어머니는 어떠한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만큼이나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단 한 가지 중요한 일은 ‘교회’였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매우 진지했고 또 엄격하면서도 적극적이었다. 우리는 기도 모임을 만들고, 성모의 날 행사 등 특별한 예식을 지냈다. 우리는 성당 근처에서 살았는데, 그곳엔 알바니아인 사제가 있었다. 어머니와 나의 누이들은 흔히 성당에서 살았던 것 같다. 우리들은 모두 성가대 일이나 전례 나아가서는 전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다.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 즈음에는, 영성체를 하기 전에,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하는 공심재를 지켜야 했다. 언젠가 토요일 밤 어린 나는 목이 말라 잠이 깨어 물을 한 잔 마셨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공심재 생각이 났다. 곧바로 어머니께 달려가 내가 저지른 잘못을 눈물로 고백했다. 어머니는 매우 심각하게 타이르시고 나서는 다음날 나를 신부님께 데리고 가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나는 영성체를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느꼈던 ‘거룩한 공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요즘 영성체하려 나가는 사람들과 비교해보라.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우리 집은 정치논쟁의 온상이었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는 하나의 수도원 같았다. 이것이 바로 공사가 오늘의 데레사 수녀가 된 이유이다. 우리 어머니는 비범하리만큼 신심이 두터웠고, 그 딸들은 언제나 성당에서 활동하며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은 늘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힘썼다. 어머니는 그곳 불쌍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먹여 살리며, 그들을 도와주면서 늘 전교에도 열성을 보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온 몸이 종창으로 뒤덮인 어떤 부인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 가족들마저 마다하는 그녀를 우리 집으로 데려와 어머니는 그녀가 다 나을 때까지 정성을 다해 돌보아주었다. 오늘의 데레사 수녀는 거저 하늘에서 난 것이 아니다.


내가 집을 떠날 때 공사는 열세 살이었는데, 그녀가 열여덟 살 되던 해 수녀원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서 6년간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수녀원에 들어가겠다는 공사의 펀지를 받고는 무척 당황하였다. 그건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누이동생은 언제나 생기가 넘쳐 활달하고 건강하며 예쁜 소녀였다. 나는 공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어떻게 너 같은 소녀가 수녀가 되겠다고 하니? 네 스스로 무덤에 들어간다는 것을 모르고 있니?” 그 전에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었다. 그때 나는 알바니아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한 다음 막 중위로 진급되어, 자부심을 갖고 있던 때였다. 공사는 내게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그 대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오빠는 2백만 국민의 왕을 섬기는 장교로서 스스로를 중요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저도 역시 전세계의 왕을 섬기는 장교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누가 옳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집안의 배경과 분위기를 생각해보며 그녀의 결단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열두어 살 때부터 벌써 선교사업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외지에서 선교사로 일하다 돌아온 신부님들을 만나, 공사는 그 체험담을 즐겨 들었다. 그녀는 자세한 얘기들까지도 다 기억해 두는 것 같았다. 공사가 열두어 살 때쯤, 예수회원이었던 본당신부가 선교지역이 표시된 세계지도를 꺼내놓자, 공사가 지도 앞으로 걸어나가 선교사들의 정확한 위치와 그 활동 등을 낱낱이 설명하여 거기 모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본당신부는 그녀의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었고 공사는 결국 본당신부와 교분이 있던 로레토 수녀회에 들어갔다.


우리들이 집에서 그렇게 살아온 신앙규율은 데레사 수녀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의 선교회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매우 엄격한 수도회다. 나는 마더 데레사에게 이렇게 얘기한 일이 있다. “너는 분명히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 같애. 꼭 어떤 군사기지나 함대의 사령관 같다.”


어머니에게서처럼 그녀에게도 엄청난 강인함이 보인다. 어린 딸을 그토록 멀리 떠나보내 수녀가 되게 한다는 것은 어머니에게도 커다란 희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다시 공사를 보지 못했다. 공사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두 모녀의 결단은 옳았다. (Catholic Digest에서 옮김) [경향잡지, 1981년 6월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내가 만난 마더 데레사 수녀

"사랑의 등불을 켜서 어두워가는 세상 밝혀야"


- 김 추기경이 한국을 처음 방문한 마더 데레사 수녀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1981. 5. 3~6)




'살아있는 성녀의 보디가드 김 추기경'


1981년 5월3일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방한하셨다. 그날 오후 공항으로 수녀님을 마중 나갔는데 어찌나 인파가 많이 몰렸던지 팔자(?)에도 없는 경호원 노릇을 해야 했다. 수녀님을 감싸 안다시피하고 인파를 헤치면서 공항을 빠져 나가는 내 모습을 보고 한 신문기자가 '보디가드 김 추기경'이라고 썼다. 물밀듯 밀려드는 기자들과 환영객을 막지 않으면 70세가 넘은 150㎝ 단신 수녀님이 다치실 것만 같아 보디가드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한국에 머문 3박4일 동안 우리 가슴에 '사랑의 불'를 놓았다. 가는 곳마다 감동적 연설로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 대한 사랑을 역설하셨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후부터 '살아있는 성녀', '빈자(貧者)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터라 신문방송사 취재경쟁도 대단했다. 기자들은 수녀님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보도하면서 전국에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다음날 서강대 강연장으로 가는 도중 신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수녀님이 하마터면 다칠 뻔했다. 그래서 마이크를 잡고 "오늘 우리는 데레사 수녀님 사랑에 취한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열기를 식혔다. 그때 사람들이 며칠 동안 수녀님을 모시고 다닌 나를 꽤나 부러워했을 게다. 어디를 가건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그분 옷자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어 아우성이었으니 말이다.


데레사 수녀님은 본래 카메라 플래시를 무척 싫어하는 분이다. 그런데도 기자들이 몸을 부딪히면서 플래시 세례를 퍼부어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으셨다. 언제 어디서건 주름 패인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가까이서 뵙건대 누구에게 보일려고 짓는 미소가 결코 아니었다. 들은 얘기지만 수녀님은 "카메라 플래시를 거부하지 않을 테니 그때마다 연옥영혼을 한명씩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청했다고 한다. 대구 희망원에 내려가셨을 때 그 얘기가 화제에 올랐는데 수녀님이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연옥이 텅텅 비었을 것"이라고 농담을 던져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데레사 수녀님은 한국 첫 방문이셨다. 그러나 난 이미 그 전에 호주 맬버른 세계성체대회에서 그분의 명성과 열정을 확인했다. 그때 야외 강연회에서 들은 생명존중 메시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늘에는 별이 많아서 아름답습니다. 들판도 꽃이 많이 필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 세상도 어린이가 많을 때 아름답습니다. 하늘에 별이 많다고, 들에 꽃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왜 어린 생명이 우리 삶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불평하면서 낙태를 합니까?"


데레사 수녀님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사신 분이다. 가난·불평등·전쟁 등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의 궁극적 해답을 갖고 계셨다. 사람들이 수녀님을 보고 열광한 이유도 그 해답,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녀님은 서강대 강연회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굶주림은 먹을 것에 대한 굶주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헐벗음은 옷을 걸치지 못한 헐벗음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굶주림과 인간 존엄성이 벗겨진 상태의 헐벗음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걱정해야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 속에서 가난하게 사셨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후 가난한 이들과 부대끼면서 살고 싶은 열망에 몸살을 앓았으나 하느님께서 그 길로 이끄신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오랜 번민 끝에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에는 내가 과연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가난하게 살면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자신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어 주춤했다. 그러다 주교로 임명돼 망설임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주교직도 하느님의 부르심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데레사 수녀님이 증거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 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다. 그분이 들었던 '사랑의 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안다. 문제는 그 사랑을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하느냐이다. 모든 사람이 데레사 수녀님처럼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큰 사랑만 있는 게 아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해주고, 옆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 한번 지어 보이는 것도 사랑이다. 마음에서 미움을 털어버리고 화해하는 것도 사랑이다. 그런데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나 역시도 일본에 대해 미움 정도가 아니라 적개심을 품었던 때가 있다. 외국에 그렇게 드나들면서도 일본항공(JAL)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일제 물품은 방에 들여놓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한 국가를 그토록 미워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서 미움과 증오를 씻어 달라고 말이다. 하느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 준 일도 많고,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도 있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래도 고해성사나 기도를 통해 잘못을 뉘우치면서 살아왔기에 사랑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생각나는 신부님이 한 분 있다. 교회 음악가로 이름을 날린 고 이문근 신부님이다. 이 신부님이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병문안을 간 적이 있는데 그날따라 나를 반기면서 말씀을 잘 하셨다. 한때 나를 만나기도 싫어하셨던 분이다. 이 신부님은 "이제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졌다"면서 옆방에 입원 중인 양기섭 신부님을 일부러 찾아갔다고 하셨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두 분은 서로 얼굴조차 마주보기 싫어하는 사이였다. 난 이 신부님을 통해서 용서와 화해의 참 모습을 보았다.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는다"고 말씀하셨다. 각자 사랑의 등불을 켜서 어두워가는 이 세상을 밝히라는 것이 그분이 남긴 메시지다. 등불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옆 사람과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도 아름다운 사랑이다. [평화신문, 2004년 5월 2일, 정리=김원철 기자]

마더 데레사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1) 생애


1997년 9월 5일 마더 데레사의 타계 소식이 매스콤을 통해 전해지자 온 세계는 한결같이 「인류의 참 어머니」를 잃게 되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애도했다. 그녀가 평상시 종교, 이념, 민족, 피부색을 초월한 모든 이로부터 얼마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 새삼 온 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녀가 존경과 사랑을 받도록 했을까? 그것은 사랑의 기적을 이룬 가난이었다. 마더 데레사는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렸던 가난한 이들 중 가난한 이였다. 그녀에게 가난은 참 기쁨이었고 자유였으며 사랑의 힘이었고 역설적이게도 풍요로움이었다. 그녀에게 가난은 막힐 곳 없이 어디든지 왕래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던 방편이었으며 비결이었다. 그녀는 '가진 것이 많으면 주기 어렵고 가진 것이 없을수록 더 자유롭게 많이 나눌 수 있다는 역설을 실천하고 증거하면서 각박한 오늘의 세상에 놀라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한 주님의 일꾼이었다.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 공화국의 수도 스코페에서 아버지 니콜라 보약스히야와 어머니 드라나 베르나이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난 다음날 아녜스 곤히아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부지런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 드라나는 매일 아침 자녀들을 데리고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하루의 첫 과제로 여길 만큼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정성을 들였으며 가난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대한 사랑을 실천하였다. 아녜스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불쌍한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복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라났던 것이다. 아녜스는 소녀시절부터 성인전과 선교사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본당의 여러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세되던 1928년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선교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 수도생활로 이끄는 소명임을 깨닫게 되며 부르심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회 사제인 본당 신부의 지도와 도움으로 그녀는 더블린에 있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 입회했다. 그 회의 수녀들이 인도에서 봉사하고 있는 일에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블린에서 두 달간 집중적으로 영어를 공부한 후 인도로 가 다질링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1931년 5월 24일 유기 서원을 하면서 「데레사」라는 이름을 택했다. 그 후 7년간 데레사는 로레토 성모회가 운영하는 캘커타의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1937년 5월 24일 그녀는 종신 서원을 했고 그 학교의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1946년 9월 10일 대피정을 참석하러 다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데레사는 획기적인 소명을 느끼게 된다. 그 수도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도우며 봉사해야 한다는 소명을 선명하게 마음의 귀로 듣게 된 것이다. 데레사는 그 날을 「영감의 날」이라 불렀다. 그녀에게 그 수도원을 떠난다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었으며 또 로마에서 특별한 허락을 받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결국 1948년 로마에서 그녀가 수도회 밖에서 수도자로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해 8월 16일 그녀는 로레토 성모회를 떠나 기초 간호학 3개월 속성 과정을 이수한 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 19일 제자인 슈바시니 다스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수도회의 첫 지원자로 마더 데레사와 합류했다. 다음 해 10월 7일 「사랑의 선교회」가 로마로부터 승인 받으며 10명의 회원이 수련기를 시작했다. 1952년 8월 22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정원까지 아픈 이들로 꽉 들어차게 되었다. 1953년에 「사랑의 선교회」본원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빈민굴의 고아들을 위한 집을 운영했고 캘커타 외곽에 나환자들의 자립 센터를 열었다. 1962년 마더 데레사는 인도 정부가 수여하는 파드나 스리 상을 받았고 시토(SEATO) 국가들이 수여하는 막사이사이 상을 받았다.


1965년 2월 1일 바오로 6세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세계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인가해 주었다. 그 동안 인도의 지역 주교의 관할 안에서 만 활동하도록 제한 받던 그들이 세계 어디에서든지 선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때 이미 3백 여명의 수녀들이 여러 개의 시설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베네주엘라에 해외 첫 분원이 시작되면서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등 여러 대륙에 분원들이 진출했다. 바오로 6세는 마더 데레사의 적극적 후원자가 되어 선교 활동을 원활하게 하도록 그녀에게 바티칸 시민권을 수여했다.


1971년엔 세계 여러 나라에 50 여 개의 분원을 갖게 되었다. 1969년 3월 26일 「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회칙을 인가 받아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이 협조자들은 세계 도처에서 사랑의 선교회의 일을 넓혀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맬컴 머거리지가 글과 전파를 통해 마더 데레사를 서방 세계에 소개함으로써 그녀는 가톨릭 신자들 뿐 아니라 세계의 각 층의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1970년대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상들을 받으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미국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상」을 받았고 영국에서 「템플턴상」을 그리고 바티칸에서 「요한 23세 평화상」을 받았다. 1979년 12월 10일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그녀가 온 삶을 바친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게 되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 후 사랑의 선교회는 놀라운 속도로 세계 여러 나라로 뻗어 나갔다.


수많은 새로운 분원들이 열리고 놀라울 만큼 많은 새로운 성소자들이 몰려 왔다. 한국에도 사랑의 선교 수사회가 1977년에 진출했고 마더 데레사는 1981년 5월에 한국을 방문 한 후 두 차례(1982. 4, 1985.1) 더 방문했으며 1981년부터 사랑의 선교 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활동해 오고 있다.


1980년엔 14개 나라에, 1981년엔 한국을 포함하여 8개 나라에, 1982년에 12 곳, 1983년에 14곳에 분원을 열었다. 1986년부터 사랑의 선교회는 다른 선교사들에게는 닫혀있던 나라들에 들어가게 되었다. 에디오피아, 남 예멘, 니카라과, 쿠바 그리고 심지어 러시아의 모스크바에도 분원 설립 허가를 받았다.

1970년 이후부터 알코홀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고 사회에 복귀시키는 치료 센터를 여러 곳에 열었다. 또한 나환자 병원과 나환자들을 위한 재활 및 사회 복귀 센터의 운영,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호 시설,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결핵 환자들과 영양실조 걸린 이들을 위한 치료소 및 요양소들을 설치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0년 4월 16일 마더 데레사는 건강을 이유로 총장직을 물러났으나 같은 해 9월 총장직에 재선출되었다.


1991년 그녀는 걸프전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두 나라 정상에게 호소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조지 부시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죄 없는 이들의 이름으로 열정적으로 호소하는 마더 데레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994년 2월 3일 미국 워싱턴의 조찬 기도회에서 초청 받은 마더 데레사는 클린턴 대통령 부처와 고어 부통령 부처 그리고 수천 명의 관중들에게 생명을 중시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해 주기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언했다.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마더 데레사를 미국 시민으로 추대하는 헌장에 서명했다.


1997년 9월 5일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며 세계 모든 이의 영적 어머니인 마더 데레사는 87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때에 이미 그의 영성을 지속적으로 실현하는 분신들, 4000 여명의 사랑의 선교사들이 전 세계에서 운영하는 구호시설, 사랑의 집은 무려 566개나 되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22일]


(2) 영성


마더 데레사의 성소의 특유성과 영성의 고유성은 그녀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의 제4서원에서 잘 드러난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봉사한다』. 이것은 그녀가 자주 인용하며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35~36, 40)



물리적 가난과 영적 가난


마더 데레사는 가난을 두 차원으로 나눈다. 한 차원은 물질적 가난으로서 의식주 같은 일상 생활 용품들의 결핍을 뜻한다. 다른 차원은 영적 가난으로서 소외감, 고독, 이기주의, 윤리의식의 결여, 애정 결핍, 무엇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결여이다. 전자의 경우는 물질적인 것이 충족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지만 후자의 가난은 해결되기 어려운 것이며 이것은 개인, 가정 그리고 사회를 병들게 하고 황폐케 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흔히 가난이란 빵에 굶주리거나 의복이 부족하거나 혹은 시멘트 벽돌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훨씬 더 큰 가난이 있습니다. 사랑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가난, 애정과 사랑에서 제외되었다고 느끼는 가난입니다. 가깝다고 여길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가난입니다'


마더 데레사에 의하면,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주거나 집 없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쉽고 그것으로 만족시켜 줄 수 있지만 버려짐, 애정 결핍 등 영적인 탈진에서 오는 쓰라린 분노와 외로움을 없애주거나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린다. 영적 가난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가정 안에서 있을 수 있으며 가난한 이는 실상 가장 가까운 가족 중에 있을 수 있다. 가난을 나누는 일은 멀리 있는 이에게 큰 일을 해주는 것이 아니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관심을 가지며 작은 일로 봉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질적 가난이 어떻게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겠는지 질문 받은 마더 데레사는 '모두가 함께 가난을 나눌 때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물질적 가난은 영적 가난이 해결될 때 자연히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나눔의 정신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대가없는 봉사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 가는 이들을 데려다가 사랑을 체험하며 임종할 수 있도록 돕는 일로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선교는 시작되었다.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쓰러져있는 이들을 만나는 대로 데려다가 따뜻한 말, 사랑의 손길로 물을 먹이고 씻어주며 상처를 치유해 주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가 그런 불행 중에 있으며 그들을 구하기 위한 기금 조성과 사회 사업 기구가 필요한데 그러한 조그마한 행위가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과 자매들이 수행하는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힌다.


『우리가 하는 것이란 태평양의 물 한 방울 정도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이 물 한 방울이 태평양에 있지 않으면 그 물은 어떻든 한 방울이라도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무엇보다도 자기네가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네를 사랑하고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적어도 살아있는 몇 시간이라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겁니다. 자기들도 하느님의 자녀이며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사실, 즉 자기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는 자들이 있음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환자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결핵을 위한 약도 있고 그 병의 치료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버림을 당한 이들에게는 마음속으로부터 진정으로 봉사하는 사랑의 손길이 아니고는 이 무서운 질병은 결코 고쳐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구호시설을 구비한 사회사업가보다 죽어 가는 가난한 이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와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스러이 봉사하는 마더 데레사의 모습이 실로 우리에게 더 밝은 빛을 던져주고 있다. 그녀의 그런 모범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사랑의 기적을 이루어 온 세상에 퍼져나가도록 촉진해왔다.


그녀가 수많은 상과 노벨상을 받았고 온갖 매스콤을 통해 세계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그의 근본 정신과 자세는 변함없었다. 그리고 세계 백 여 개 나라의 560 개 이상 사랑의 집에서 4천 여명의 사랑의 선교사들이 (봉사 분야는 상황에 따라 다양해졌을지라도) 창립자의 근본 정신에 따라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장 가난한 이들로서 오늘도 사랑의 봉사를 하고 있다.



복음적 가난 : 하느님 섭리에 맡기며 봉사하는 자세


마더 데레사는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사랑하며 봉사해야하는 자신들을 가장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한다. 『누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 배고픈 사람, 잊혀진 사람, 헐벗은 사람, 집 없는 사람, 나병환자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사랑의 선교사들 우리 또한 가장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일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선 성체성사적 일치가 필요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자신과 자매들에게 가난은 어느 것으로부터 구속되지 않고 나누며 헌신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자유이며 기쁨이라고 표현한다. 이 가난의 자유는 또한 그들 자신의 사명을 하느님의 섭리에 온통 맡기며 일하도록 해준다. 『우리의 사업을 국가가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교회의 어떤 원조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급료도 받지 않으며 대여세도, 은행에 구좌도 어떠한 경제적인 고정 수입도 없습니다…그러나 언제나 의지할 데가 있습니다…꽃이나 새나 들의 풀보다 소중하다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는 인간적 안전 장치의 유혹 마저 거부한다. 어느 날 인도의 한 부자가 마더 데레사의 구호 사업을 위해 큰 돈을 기금으로 은행에 예치해 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조건은 그 기금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더 데레사는 그의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하는 회신을 보냈다. 그러한 기금이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자세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동안 돈을 은행에 예치시켜 놓을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 기금 조성이란 조건 없이 그 돈 전부를 기부했다.


한 주교가 그의 교구 안에서 활동하는 사랑의 선교사들의 경제문제를 염려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님은 이 곳에서도 실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자원이 없어 하는 일을 중단 한적 없느냐고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에겐 남아 본적도 없었지만 부족해 본적도 없었습니다. 때로는 그런 일이 신기한 방법으로 기적에 가깝게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을 거라고 불안으로 눈을 뜨곤 합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면 거의 항상 기대하지 않았던 물품이 무명의 희사자로부터 배달되어 오곤 합니다』


어느 날 아침 주방 책임 수녀가 먹을 음식이 없다고 난감해 하며 마더 데레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학교들이 쉬게되어 학생들에게 지급될 빵이 데레사에게 배달되었다. 그녀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어린이들과 7000명의 식구들이 이틀동안 그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일생동안 그렇게 빵을 풍족히 먹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온 시내의 어느 누구도 왜 학교가 쉬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하느님의 신비로운 배려로 알아들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5월 13일]


(3) 선교의 영성


마더 데레사는 수도 서원 때 예수 아기의 데레사 성녀를 수호자로 정하면서 그 이름을 선택했고 생활과 활동에 있어서도 수호 성녀의 영성 자세를 본받고자 했다. 예수 아기 데레사는 「일상적 일을 비상한 사랑으로 실행하신 분」으로 확인되며 시성 되었던 것이다.


마더 데레사와 사랑의 선교회 자매들은 지칠 줄 모르게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해 지극히 평범한 봉사 활동을 뛰어난 사랑으로 실천해 왔다. 한편 성령께서 그들의 사랑의 봉사 활동에 놀라운 결실을 이루어 주고 계심을 도처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1) 가장 버림받은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일상의 관상가’


마더 데레사는 자매들이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보고 만나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상의 관상가들이 되기를 가르쳐 왔다. 실로 그들은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들, 나병환자, 에이즈 환자 등 죽어 가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으며 사랑으로 봉사한다. 마더 데레사는 어느 날 한 입회자가 다른 자매들과 함께 임종자의 집으로 봉사하러 떠나려 할 때 이렇게 권고의 말을 했다.


『미사 드리는 사제가 빵의 형상 안에 계신 예수님을 얼마나 큰 사랑과 섬세한 정성으로 만지는지 여러분은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임종자의 집에 가면 그와 같이 하십시오. 가난한 이들의 고통받는 육체의 형상 안에 바로 예수님이 계십니다』


자매들이 세 시간 후 돌아 왔다. 그들과 함께 다녀온 입회자가 기쁨 충만한 모습으로 마더 데레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우리는 하수구에 빠져있던 사람을 임종자의 집으로 옮겨왔는데 그는 불결했고 상처에 온통 구더기로 덮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예수님으로 생각하면서 씻어 주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시지만 고통 중에 있는 이를 각별히 사랑해 주신다는 메시지는 그러한 상태에 놓여있는 이들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사랑의 선교회 자매들은 그 진리를 그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한다. 한편 그들은 그 진리를 사랑으로 봉사하는 자매들 안에서 확인한다.


마더 데레사는 어느 날 나환자들에게 그들의 신체적 질병은 결코 죄의 결과가 아니고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은 특별한 애정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다고 격려했다. 그 때 나병으로 온통 일그러진 한 노인이 마더 데레사에게 가까이 와서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나를 기쁘게 했어요. 나는 언제나 어느 누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들어왔지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군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2)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신뢰하며 임종자를 천국 문턱까지 동행


마더 데레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흔들림 없는 신앙의 증거자로 산 분이다. 그녀는 참된 신앙을 전제로 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충만하게 확신하고 있음을 잘 드러냈는데 이것은 가톨릭 교회와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의 한계를 가장 폭 넓은 선으로 포용하는 선의의 신앙이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마더 데레사와 자매들은 매일 죽어 가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대하면서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개종이나 종교적 신앙고백을 변경시켜 주려는 시도를 자제한다. 그들은 각자의 믿음을 존중하며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최선의 도움을 베푼다. 힌두교인들에게 갠지스 강의 물을 가져다준다든지 가톨릭 신자들에게 사제를,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목회자를 모셔다 주는 일 등이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들에게 자매들이 결코 간과하지 않는 것은 잘못에 대한 뉘우침과 구원을 보증하는 절대자의 이름(하느님에 상응하는 이름)을 부르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마데 데레사는 이러한 일을 하면서 많은 이들을 천국 문턱에까지 동반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러므로 병들고 버려진 이들은 임종자의 집에서 어떠한 차별 없이 사랑의 선교회 자매들의 따뜻한 사랑의 봉사를 받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평화로이 죽어 간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캘커타에서 우리는 2만7000 명 이상의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데려 왔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하고 우리가 그들을 길거리에서 구호소로 데려 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매우 평화로이 죽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들은 고요하게 죽어 갑니다. 자매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다음과 같이 말하길 꺼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는 하느님(혹은 그에 상응하는 절대자) 앞에서 잘못 한 것을 뉘우칩니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말하기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거의 죽어가고 있던 한 사람을 임종자의 집에 옮겨 왔다. 지극한 간호와 보살핌을 받고서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길거리에서 동물처럼 살았어요. 그런데 이토록 관심 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천사처럼 죽을 수 있게 되었군요. 나는 이제 하느님의 집으로 갑니다』



3) 사랑 실천은 가장 효율적 선교


마더 데레사와 자매들이 가장 가난한 이 들에게 실천하는 사랑의 봉사는 그 자체로 선교이다. 이슬람인들은 사랑의 선교회 자매들을 '사랑의 전달자들'이라 부른다. 그것은 자매들이 실천하는 영웅적 사랑에서 그들이 큰 감명을 받기 때문이다.


마더 데레사는 1978년 독일 프리브룩 주교좌 성당에서 강연 중에 이슬람 국가 예멘에 초대받은 사랑의 선교회 자매들의 증거의 삶에 대해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증거의 삶의 풍성한 결실을 살펴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행위가 아니고 오히려 행동에 옮기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우리가 초대받은 나라 예멘에는 그리스도교 신앙 금지 800년만에 우리 자매들의 현존이 그 백성의 생활 안에 새로운 빛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 통치자는 로마에 이렇게 써 보냈습니다. 수녀님들이 여기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굶주린 그리스도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그리스도에게 옷을 입히며 버림받은 그리스도를 맞아줍니다』


마더 데레사의 강연에서 소개한 수많은 감동적 이야기들 중 한 가지 더 인용한다면 이러한 것이 있다.


『자매들은 4만9000명의 나환자들을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장 버림받고 사랑 받지 못 하며 가장 소홀히 취급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우리 자매 하나가 상처투성이인 나환자를 치료해 주고 있었습니다. 한 이슬람 사제가 그 자매 옆에 서 있다가 고백했습니다. 「그 동안 나는 줄 곳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예언자라고 믿어 왔습니다. 오늘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분은 놀라운 사랑으로 이러한 일을 하도록 이 자매에게 큰 기쁨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랑의 봉사는 무신론자들에게도 감동을 주어 하느님이 계심을 깨닫고 믿도록 이끌어 준다. 쓰레기장에서 죽어 가는 환자 하나를 자매들이 임종자의 집에 막 옮겨왔을 때 어떤 사람이 그 곳을 방문했다. 그 사람이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 한 채 한 자매가 아픈 이를 간호하고 있었다. 자매가 아픈 사람을 세심히 보살펴 주고 닦아주며 미소지어 주는 것 등 조그마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 광경을 관찰한 그 사람은 마더 데레사에게 와서 말했다.


『저는 여기 올 때에 미움 가득 찬 마음으로 하느님은 제 의식에 없었습니다…지금은 하느님으로 마음이 충만해진 가운데 떠나갑니다. 저는 그 수녀님의 행동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을 대하는 수녀님의 손, 모습 그리고 그 수녀님 전체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내려옴을 보았습니다. 지금 저는 믿습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5월 20일]



(4) 기도


다음과 같은 마더 데레사의 기도문 안에서 그녀의 사도직 활동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살펴 볼 수 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하는 힘을 얻게 된다. 기도는 그 은총을 받는 통로이며 방법이다.


『고통받으시는 주님, 제가 오늘도 그리고 날마다 아픈 이들 속에서 주님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을 돌봄으로써 주님께 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이 분노와 범죄와 정신이상과 같은 매력 없는 가면 속에 숨어 계셔도 제가 주님을 알아보고 「고통받으시는 예수님, 당신께 봉사하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 일인지요」 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믿음으로 눈뜨게 해 주시어 저희의 일이 결코 단조롭지 않게 해주시고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싶은 열정 속에서 기쁨을 찾게 해 주소서』


1) 사랑의 봉사는 쉽지 않은 것


마더 데레사는 한 인터뷰 중에서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수행하는 일이 쉽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집중적 기도생활과 희생정신 없이는 쉽지 않지요. 우리가 가난한 이들 안에서 수난의 슬픔을 겪으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서로 평화스럽게 살아가도록 해 줄 수 있다면 우리도 행복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욕구를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이 지금 처한 상황보다 더 어렵게 되 않을까 두려워, 서로를 위협적인 경쟁 상대로 보지 않고 조화롭게 이웃을 도우며 평화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모습에서 불쾌감을 경험한 적은 없는 지 질문 받은 마더 데레사는 자신에게도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시인했다. 『네. 우리는 주로 죽어 가는 이들, 버림받은 노인과 가난한 이들, 고아와 나환자들 사이에서 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 대부분이 힘들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언제나 수용할만한 조건에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부자들 사이에서보다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일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생 동안 할 일입니다』


2) 사도직 수행의 비결은 기도의 삶


마더 데레사는 자신들은 단순한 사회 사업가가 아니라 선교사들이며 세상에서의 관상가들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마더 데레사에게 관상이란 기도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분과 일치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삶까지 포함한다.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단순한 사회 사업가로 비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살고있는 관상가들입니다. 우리는 매일 24시간 동안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활동을 기꺼이 실천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을 때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 비결은 단순합니다. 기도합니다. 기도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에 저를 일치시킵니다.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그분의 계명을 수행한다는 것임을 저는 깨닫게 됩니다…저에게 기도는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도록 그분의 뜻에 일치하며 매일 24시간동안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유용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 서있음을 늘 의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나는 모든 이들 안에서 주님을 보고 만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살아 있는 기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는 예수께서 지상에 계신 동안 언제나 기도와 활동을 일치시키셨듯이 자신들도 노동에 기도를 일치시켜야 함을 강조했다. 『우리는 노동에 기도를 일치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노동을 기도로 전환시키도록」 우리 자매들을 이끌어 주며 그들 안에 이 원칙을 심어 주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노동은 기도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노동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노동을 기도로 전환시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노동을 하면서 가능해집니다. 이것은 우리 노동을 기도로 전환시키는 방법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자신들의 사도적 활동을 주님의 뜻대로 수행할 수 있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협조자들의 기도 지원을 청했다. 『우리들이 하느님의 일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사업이 그분의 것 그대로 계속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이나 저는 세상을 정복하기 위하여 폭탄도 대포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랑과 선을 이용합니다. 이 「기쁜 소식」이란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기도 부대의 필요성을 느끼며 남 여 관상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관상 수도자들은 기도와 성체조배, 희생과 보속활동에 전념하면서 생활한다. 그러나 그들도 매일 두 시간 정도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도록 도와준다. 하루의 일부 시간 동안 가난한 이들 안에서 만나는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자신들의 관상생활을 보완하는 것이다.


3)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침묵


마더 데레사는 기도를 잘 하기 위하여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침묵의 방법을 소개했다. 『하느님은 침묵 속에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기도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직면하게 되면 그분은 당신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분 자신으로 당신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 스스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텅 빈 공백임을 깨달을 때입니다. 기도하는 영혼은 큰 침묵의 영혼입니다』


마더 데레사에 의하면 기도의 본질적인 국면은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나 다른 이들에게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도 침묵 중에 하느님의 음성을 경청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할 때 마음이 하느님으로 가득 차게 되고 우리의 입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는 그녀가 가난한 이들의 비탄 속에 계신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필요한 힘을 침묵의 기도에서 얻고 있다고 밝혔다.


4) 성체성사의 삶


마더 데레사는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삶은 무엇보다 성체성사의 삶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랑의 선교사들이 성체 성사로 양육되도록 배려하였다. 『우리는 성체로 살아야 하고 마음과 삶이 성체로 짜져야 합니다. 사랑의 선교사가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성체에 연결되어 있습니다…우리는 성체와 가난한 이, 또 가난한 이와 성체를 따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분께서 그분에 대한 나의 배고픔을 채워주셨으므로 이제 나도 그분의 영혼에 대한 그분의 배고픔을, 사랑을 채워주러 갑니다. 성체는 기도의 성사이자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이며 샘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성체가 가난한 이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우리를 이끌어 가지 않는다면 그 성체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사랑의 선교회 자매들은 그들의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성체와 일치의 삶을 산다. 그들은 하루의 일과를 미사, 영성체 및 묵상으로 시작하고 한 시간의 성체조배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성체와의 일치에서 그들은 힘, 사랑 그리고 기쁨을 얻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5월 27일]


(5)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1) 마더 데레사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는 다른 수도원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세 가지 서원에 한 가지를 첨가해 제4서원을 한다. 그것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봉사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선교회는 가난, 정결, 순명 뿐 아니라 가장 가난한 이들처럼 살며 그들에게 기꺼이 사랑으로 봉사하고자 다른 하나의 서원을 더 선택하여 준수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 수도회의 특별 카리스마와 고유한 영성이 잘 드러난다. 마더 데레사와 자매들은 이 사랑의 서원을 통해 받는 은총이 '가장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도록 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섭리에 온통 위탁하도록 인도해 준다'고 체험을 통해 고백한다.



2) 마더 데레사의 자매들은 고통받는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광의적 관상생활을 한다.


본 의미의 「관상」이란 침묵 중에 직관을 통해 하느님을 인식하고 사랑하면서 친교를 이루는 것이지만 마더 데레사가 자주 언급하는 「세상 안에서의 관상」이란 광의적인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살고있는 관상가들입니다. 우리는 매일 24시간 동안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서의 관상」이 가능하다는 근거를 마더 데레사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찾아냈다. 『너희가 여기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실로 그리스도인의 넓은 의미의 「수평적 관상생활」은 모든 사물 안에서 특히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만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한 수평적 관상생활은 하느님의 뜻을 끊임없이 찾고 감사드리는 기도와 성령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이 분노와 범죄와 정신이상과 같은 매력 없는 가면 속에 숨어 계셔도 제가 주님을 알아보고 「고통받으시는 예수님, 당신께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일인 지요!」 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 마더 데레사는 비참한 전쟁들과 참혹한 학살, 이념적 및 종교적 대립, 착취, 인권 유린 등 형언할 수 없는 잔혹성으로 얼룩진 20세기의 각박한 상황에서 「행동하는 사랑」으로 사랑의 기적을 일으킨 주님의 도구였다.


자매들과 함께 그녀는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 나병환자, 에이즈 환자 등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듯이 그들에게 봉사하며, 그들이 사랑이 무엇인지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를 느끼도록 해 주고자 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마더 데레사와 자매들이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만큼 감정이 메마른 이들에게까지 동정이 아닌 참 사랑을 느끼게 한다고 증언한다.



4) 마더 데레사는 노벨 평화상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상들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로서, 그 상들이 하느님께 영광 드리며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하느님의 사업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 가난한 이들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기꺼이 수락했다.


그녀는 상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상을 받을 때나 받지 않을 때나 저는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제겐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꺼이 상을 받아들인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환자들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이 사랑의 선교사들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일하는 것을 사람들이 더욱 선의로 바라 볼 수 있도록 크게 돕는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은행장이며 장로교 신자인 로버트 맥라마라는 마더 데레사를 노벨 평화상의 후보로 추천하면서 그 타당성을 이렇게 진술했다. 『데레사 수녀는 인간의 존엄성과 신성함에 대해 확신감을 갖고 가장 진실한 태도로 인류 평화에 도모했기 때문이다』


노벨 평화상이 마더 데레사를 기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굶주린 이를 먹게 해주고 헐벗은 이들을 입혀주며 집 없는 이를 보호해 주는 복음적 사랑실천이 온 세계가 주목하는 오슬로에서 평화의 사업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5) 마더 데레사의 사랑 실천의 사도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도록 종교, 이념, 민족, 계층을 뛰어넘어 놀랄 만큼 광범위하고 신속하게 전파되도록 했다.


힌두교가 주종을 이루는 인도뿐 아니라 800 여 년간 그리스도교 신앙을 금지해 온 예멘을 비롯하여 이슬람교의 나라들 그리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 마저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선교회원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적극 협력하고 있다. 어떠한 선교단체나 종교생활 단체도 철저히 배격해 오던 소련이 1988년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선교회를 초청한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얼마 후 마더 데레사는 소련 평화협의회의 최고상인 금메달을 받았다.


그녀와 사랑의 선교회 활동에 대한 세계 매스컴의 보도와 그로 인한 수많은 이들의 관심과 감동, 거기에 그녀가 받은 노벨 평화 상 등 수많은 세계적 상과 메달들은 더욱 그녀를 유명하게 했고 「살아있는 성인」으로 호칭하도록 했다. 그녀의 사도직은 교회의 복음선포뿐 아니라 수도자들의 생활과 헌신적 사도직의 존귀함을 세계에 널리 알렸고 또한 수도성소의 계발과 비신자들에게까지 수도자의 위상을 높여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6) 마더 데레사는 세상의 가난을 극복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살고 활동하고 있는 위치에서 조그마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시작되고 실현 가능하다는 진리에 빛을 비추어준다.


사람들은 세상의 수많은 지역의 거대한 가난의 상황에 비해 마더 데레사와 자매들이 수행하고 있는 일이 너무 미흡하고 그들이 펴고있는 의료활동도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이라 비판하면서 그녀의 명성을 이용해 기금을 모으고 거대한 현대식 구호시설을 갖추어 체계적인 사회 사업을 하기를 권고했다. 그녀는 간결하게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은 저를 성공하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성실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정부 기관이 무언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면 할수록 좋습니다. 가난의 원인을 뿌리뽑는 것은 정부가 할 일입니다』『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 가셨습니다…우리는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더 데레사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해결되어야 할 산적한 문제 거리에 앞서 사랑을 받아야 할 인간들이다. 그녀는 무엇이 행해져야 할 것인가 하는 이론이 아니라 나, 너 그리고 우리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원하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는 『나눔 없이 평화는 없다』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일깨우며 사랑의 나눔을 호소하였다. 『세상은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한없이 궁핍하다』는 간디의 명언대로 탐욕은 전쟁, 빼앗음, 이기주의 그리고 물질적 가난을 초래하는 영적 가난을 낳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마더 데레사가 제시한 과제를 명심하고 실행해야한다. 『가난의 해결은 모두가 함께 나눌 때 가능합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3일]

영화와 신앙: 청빈과 순명 그리고 큰 사랑의 이름

마더 데레사(Mother Teresa)


조혜정 영화평론가 · 수원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이 글은 영화평론가로서가 아니라 이제 갓 신앙을 갖게 된 신자의 눈과 마음으로 쓴 것임을 미리 고백한다.)

영화만큼 인간의 오감(五感)을 자극하고 활용하는 매체도 드물 것이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고. 여기에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것을 느끼는 여섯째 감각, 곧 식스 센스(sixth sense)까지 영화 속으로 들어온 지 오래다. 엄밀히 말해서 영화는 시각과 청각에 기대어 있고 다른 감각들은 상상한 것에 불과하지만, 영화 기술의 발달과 ‘핍진성’(逼眞性)을 강화시키는 내러티브 구조에 따라 영화는 강한 현실감을 부여받는다.


사실 종교가 선교나 신자 재교육 등에 영화 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활용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하다. 자칫 성서의 여러 기록들을 고답적이고 믿기 어려운 신화나 설화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알리고 성인들의 삶과 신앙을 부담 없이 접해볼 수 있도록 하는 데 영화만큼 강력한 매체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영화는 시점을 ‘지금’으로 현재화시키며, 주체와 대상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데레사 수녀의 삶과 신앙을 다룬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봉사로 헌신한 그분의 삶 그리고 지극했던 신앙을 각인시키고 전파하게 될 것이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1910년 알바니아 태생인 데레사 수녀는 1928년 인도 선교활동단체인 로레토 성모수녀회에 들어가 인도 캘커타에서 교사로서 생활한다. <마더 데레사>(파브리지오 코스타 감독)는 그가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하게 되는 과정과 그 뒤의 활동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당시의 캘커타는 종교적 분쟁과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거리 아무 데나 쓰러져 기아와 갈증과 병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충격과 깊은 슬픔을 느낀 데레사 수녀는 1948년 단돈 45루피(우리 돈으로 약 1080원)로 가난한 이들의 안식처인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한다. 영화는 선교회를 설립하기까지 데레사 수녀가 겪게 되는 반대와 편견과 오해를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로레토 수녀회 내부의 반대, 대주교를 비롯한 교구의 회의적 시선, 힌두교도들과의 종교적 갈등과 오해, 캘커타 행정 당국의 비협조와 방해 그리고 교황청의 부정적 견해까지 선교회를 설립하고자 거쳐야 할 난관은 도처에 있음을 보여준다.


<마더 데레사>는 영화로서의 극적 재미만 보자면 또 비평적 잣대로만 보자면 높은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스펙타클이 주는 장쾌한 맛이나 드라마틱한 상황이 주는 긴장감을 찾기 어려우며, 섬세하고 정교한 심리적 접근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미덕은 바로 마더 데레사 그 자체이며 그것은 화려하게 포장된 그 어떤 매력보다도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그리고 헐벗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한 데레사 수녀의 큰 사랑은 신자, 비신자를 불문하고 보편적 인간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울림을 가져다줄 것이다.


“오직 주님 손 안의 몽당연필일 뿐”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데레사 수녀의 선택과 태도였다. 너무 일천하고 얄팍한 신앙이라 더욱 성인들의 신앙에 대한 부분에 관심이 갔던 탓이다. 데레사 수녀는 매번 자신을 주님께 맡겼다.


“전 헐벗고 고통받는 이들에게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이 모든 것은 저의 일이 아니라 그분의 일입니다. 그분은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전 나약한 인간입니다. 전 오직 주님 손 안의 몽당연필일 뿐이고 쓰시는 분은 주님이시죠.”“그분이 없으면 길을 잃어버리거든요.”


데레사 수녀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을 도구로 쓰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온전히 따를 수 있었던 것이리라. ‘주님의 뜻’을 말하면서도 사실상 그것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자신의 선택이라는 오만함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 또한 얼마나 많은가. 데레사 수녀가 보여준 주님의 뜻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신앙인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그러나 가장 어려운) 신앙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데레사 수녀는 ‘주님의 뜻’을 가장 소박하게 읽어냈다. 치장되지 않고 부풀려지지 않은 믿음. 그 소박한 믿음이 가장 큰 울림을 준다. 선교회의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걸맞은 조직체계의 필요성을 주변에서 거론할 때, “주님은 작은 것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특히 사랑으로 행하는 작은 일들을 말이에요.” 하고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선교회 일이 몇 사람의 손으로 지탱하기에는 벅차게 되자 그는 선교회를 관장할 조직체를 허락하게 된다. 무릇 조직이란 좋은 목적과 선의에도 관성화되고 관료화되는 속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법 아닌가. 호텔에서 열리는 회의석상에 3달러짜리 생수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데레사 수녀는 조용하고 단호하게 조직의 해체를 언명한다. 물 한 병 값인 3달러면 아이 하나를 1년간 학교에 보낼 수 있는데, 그 돈을 회의하면서 마시는 물 값으로 지불한다는 것이 본디 선교회의 출발 의지와 ‘주님의 뜻’과는 멀어졌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시작한 그 뿌리로 돌아가야 해요.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말입니다.”


평생을 어렵고 힘들고 헐벗은 이들을 위하여 사랑을 전하고 실천한 마더 데레사의 삶은 종교를 초월하여 세상 사람들을 움직였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고,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고, 위로받기보다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주는 삶을 스스로 보여준 마더 데레사. 그는 1997년 주님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굳건한 신앙과 사랑의 삶을 기리며 2003년 10월 19일에는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 마더 데레사의 시 “당신의 등잔을 계속 타오르게 하십시오”(Keep your Lamp burning) 중에서.

[사목, 2005년 2월호]

사랑의 선교 수녀회

"그리스도의 무한한 목마름 채운다"


-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창립한 마더 데레사 수녀가 생전에 인도 캘커다의 한 병원을 방문, 어린 환자와 담소하고 있다.



창립과 영성


『목마르다』(요한 19, 28).


20세기의 성녀라 일컬어지는 「마더 데레사」가 창립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 영성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절명하시기 전 하신 말씀 「목마르다」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인간을 향한 사랑의 행위, 그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작은 자들을 위한 헌신의 삶으로써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목마름을 채운다는 의미다.


『가진 것이 많으면 베풀 것이 없다』고 했던 마더 데레사는 「그 어떠한 부(富)도 피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회원들 역시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활동은 사회사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가장 가난한 모습 속에 투영돼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완전한 신뢰와 자아 포기, 그리고 항상 기뻐하는 정신으로 함께 나누고 있다. 그 모든 것은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끝없는 목마름을 채워드리기 위함이다.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그분을 간호해 주고, 먹을 것을 주며, 옷을 입혀주고,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그분을 방문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란 단순히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사람, 알코올 및 마약 중독자, 삶의 희망과 신앙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 성령의 힘 안에서 희망을 갖지 못한 모든 이들을 뜻한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가난한 이들 속에 뛰어들어 그들과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용기, 또 그러한 상황에서 더욱더 강인한 의지를 지닐 수 있도록 한 힘은 마더 데레사가 항상 모든 사도직 활동의 최우선에 두라고 강조했던 「기도」에서 비롯됐다.


마더 데레사의 세속 이름은 아녜스 곤히아 브악스히야(Agnes Gonxha Bojaxhiu)였다.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 스코페에서 태어난 그녀는 신심 깊은 알바니아계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아 일찍이 예수회 선교사가 지도하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에 가입, 신심회 회원들과 신앙생활에 관한 편지를 돌려가며 읽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어떤 감화를 받고 1928년 11월 29일 인도에서 활발히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로레토 수녀회(Sisters of Loretto)에 입회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6일 캘커타에 도착하여 1931년 5월 24일에 「예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택하였다. 이후 데레사 수녀는 비교적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는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쳤으며, 1944년부터는 교장직을 맡는 등 18년 동안 교편생활을 하였다.


1946년 9월 10일, 피정차 히말라야 산기슭의 다르질링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그녀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섬기라」는 또 다른 부르심을 받게 됐다. 그러한 부르심은 힌두이즘이라는 종교 전통과 카스트 제도로 전체 인구의 30%가 절대 빈곤층인 사회현실 속에서 불공평, 사회적 무관심으로 거리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빈민들 모습에 사랑과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데레사 수녀는 「일을 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강한 확신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원의를 총원장 수녀에게 밝혔고 그로부터 1년 반 만인 1948년 4월 12일, 재속 수녀로서 빈민들을 위한 활동을 허락한다는 교황청 뜻에 따라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시작했다.


「사랑의 선교수사회」(1963년)「협력자회」(1969년) 「사랑의 선교 관상수녀회」(1976년) 「사랑의 선교 관상수사회」(1979년) 「사랑의 선교 사제회」(1984년)등이 데레사 수녀에 의해 창립, 같은 영성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7월 27일, 이주연 기자]



빈민가 등지서 사랑의 봉사 펼쳐


- 사랑의 선교수녀회 국내 진출은 1981년 5월 마더 데레사 수녀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이뤄졌다.



사도직 활동


성인 반열에 오른 마더 데레사는 이로써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생의 가장 절망적이고 비참한 순간에 마지막 도움을 청한 이들을 따뜻이 어루만져 주었던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머니임을 공식적으로 확인 받았다 할 수 있다.


1948년 8월 16일 인도 고유의 부인복 「사리」를 수도복으로 걸친 데레사 수녀는 고등학교 교장에서 빈민들의 종으로, 평화롭던 공동체에서 무관심과 가난과 질병이 들끓는 모티질(Motigil)의 빈민굴로 자리를 옮겼다. 그해 12월 1일 빈민학교를 열고 어린이들에게 뱅골어를 가르쳤으며, 수업이 없는 오후에는 행려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수도회는 1949년 3월 19일 성 요셉 축일에 스바시닌다스가 처음 입회하면서 공동체 구성이 시작됐다. 이어 소식을 접한 성마리아고등학교 제자들의 계속적인 입회로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수도 공동체로서 면모를 갖추게 됐다.


교구 설립 수녀회로 정식 인가를 받은 후 힌두 사원 순례자들이 이용하던 숙소를 캘커타시로 부터 지원 받아 임종자들을 위한 집 「니라말 히르데이」(깨끗한 마음)를 개원한 수녀회는 프램단(결핵환자 요양소), 쉬슈바반(어린이들을 위한 집), 프렘 니바스(나환우 요양소)를 잇달아 마련했다. 한국 진출은 1981년 5월 마더 데레사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수녀회를 정식 초청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이로써 같은 해 6월 30일 세 명의 인도 회원이 입국했다.


현재 안산과 인천 광주 양로원에서 각각 40여명 무의탁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는 수녀회는 빈민가.병원.요양소.교도소.양로원.고아원.재활원 등에 있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 위로와 작은 사랑의 봉사를 펼치고 있다.


인도 캘커타의 로워 서큘러에 총본부를 두고 있는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1998년 3월 현재 동유럽 공산국가.러시아.이라크.캄보디아 등 150여 개국 614여 개 분원에서 400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후 스리랑카.방글라데시.탄자니아.예멘.오스트레일리아.영국.아일랜드.요르단 등으로 진출하였으며 1980년대부터는 마약 중독자.매매춘 여성들.매맞는 여성들을 위한 집을 세계 도처에 마련하고 낙태 반대 운동과 함께 입양사업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설립 이후 25년간 750명의 회원들이 60여 개의 학교에서 7500명의 빈민 어린이들을 가르쳤으며, 54개의 요양소에서 4만 7000명의 나환우들을 치료하고, 20여 개의 고아원에서 1600명의 아이들과 23개의 보호소에서 3400명의 행려자들을 보살피고 있다. 또 최근에는 미국 등 선진국으로도 진출하여 비단 극빈층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되어 생활하고 있는 에이즈 환자들을 치료하는 한편 재해 구제 프로그램과 불법 이민자들을 위한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임종을 맞는 이들에게는 고해?병자성사로 거룩한 임종을 준비시켜 주고, 무의탁 환자들은 임종 때까지 기거할 수 있도록 수녀회 양로원에 안식처를 준비해 준다.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전례.가정 묵주기도 등 영적 가난함을 키우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장애인, 불구자, 맹인, 나환우, 결핵환자, 에이즈 환자들에게는 요양원을 제공해 주고 재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단기 보호시설, 야간 보호시설을 제공하고 탁아소.무료급식소.미혼의 집을 운영하며, 정신질환자.걸인들을 위한 거처를 제공하고 빈민가에서 무료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또한 공소활동을 하고 주부나 젊은 여성들에게 수예 등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3일, 이주연 기자]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한평생


한평생 가장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던 마더 데레사는 1997년 9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2003년 10월 19일 시복됐다.


2000년 대희년은 교회와 인류에 새로운 세상,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이 더욱 넘쳐나는 세상이 되기를 고대하는 인류의 염원이 절정에 달한 순간이었다. 새 천년기를 맞는 전세계 가톨릭교회는 막 문을 연 제삼천년기가 하느님의 참 평화가 지구촌을 가득 메우게 되기를 간절하게 염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 다시 인류는 끊이지 않는 갈등과 반목 속에서 서로를 향해 총칼을 겨눈 채 형제의 피를 흘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인류는 초강대국 미국의 심장부를 향한 초유의 항공기 테러에 직면하게 된다.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하릴 없이 무너져내린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전세계인들은 인간의 증오가 얼마나 참혹한 비극을 자아낼 수 있는지 너무도 또렷하게 목격했다.


이후 전세계는 테러와 대테러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를 공격해 이른바 세계의 경찰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려 했지만 결코 테러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조직적이고 대범한 테러 행위들이 세계 도처에서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오늘 세계에서 진정으로 평화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더 위력적인 무력은 전쟁을 잠재우지 못하고 오히려 더 잦고 더 잔혹한 투쟁만을 불러오고 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참 평화는 오히려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빈민촌 한켠에서부터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 10월 16일 바티칸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재위 25주년을 기념하는 미사가 거행됐다. 사흘뒤 바로 이 자리에서 교황은 이미 살아서부터 성녀로 추앙받았던 마더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을 거행했다. 가난한 이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어머니가 되어주었던 데레사 수녀의 시복은 그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교황은 30여만명의 순례자들이 모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마더 데레사를 새로운 거룩함의 모범으로 제시해주셨다』며 마더 데레사의 시복을 선언했다. 시복식이 거행된 광장의 맨 앞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했던 그녀의 정신에 따라 3천여명의 빈민들이 초대돼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더 데레사의 뒤를 이어 사랑의 선교회를 이끌고 있는 니르말라 조쉬 수녀는 시복식에 즈음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은 바로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표지』라고 말했다.


그 말은 참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짓이기도 하다. 60억 인류의 가슴 속에는 참 평화에 대한 열망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말은 참말이다.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전장에서조차 우리는 용서와 화해, 평화를 갈망한다. 서로가 조금만 마음을 열면 상대방의 진심을 읽을 수 있고 그러면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서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참 모습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역사에서 어느 한 순간도 전쟁이 멈춘 순간이 없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인종, 종교, 민족과 이념에 따라,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익에 따라 반목과 갈등의 악순환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의 시복식은 더욱 인류에게 엄청난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결코 어떤 차이도 사람을 차별하거나 죽어가게 내버려둘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자신의 온 삶으로 웅변했기 때문이다. 그의 삶 자체가 바로 제삼천년기 인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데레사 수녀의 거룩한 생애를 증거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데레사 수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이며 그녀의 어머니 같은 사랑을 직접 경험한,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1996년 11월 23일 데레사 수녀가 심장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는 의사들의 치료를 거부하면서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병원 구경도 못하고 죽어가는데 왜 나는 이토록 극진한 간호를 받아야 하는가』그는 죽음 앞에서 가난하지 못한 자신을 꾸짖고 안락한 병원 침대 위의 자신을 자책했다.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의 한 알바니아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18살에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 수도회에 들어가 이듬해 인도 캘커타의 성모여자고등학교에 가서 2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는 세계 제2차 대전의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내몰리는 것을 보면서 담 너머의 가난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캘커타의 빈민촌으로 들어갔고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면서 「사랑의 선교회」를 통해 전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얼굴」이다. 그가 돌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총부리를 겨눌 때 그것은 곧 하느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창으로 찌르는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더 위력적이고 큰 대포나 폭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사랑의 혁명」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제삼천년기 인류의 미래는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가져오는 바로 이러한 「혁명적 사랑」을 통해서만 밝게 열릴 것임을 데레사 수녀는 지금도 우리에게 일러준다.

[가톨릭신문, 2003년 12월 14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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