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2월 09일

02/08/2018

02월 9일(녹) 연중 제5주간 금요일

Friday of the Fifth Week in Ordinary Time

 

 

 

 

+ 1열왕기 11, 29-32; 12,19

< 이스라엘은 다윗 집안에 반역하였다. >


해설) 솔로몬은 자기 부친 다윗과 같은 장수가 아닙니다. 솔로몬의 통치 기간 중에 다른 나라와의 전쟁은 없었으며, 솔로몬은 다윗 왕이 복종시켜 놓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지배를 계속 유지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솔로몬의 정권 말기에 북부 지파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하며 예언자도 반란을 부추깁니다.

 

 

29 그때에 예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실로 사람 아히야 예언자를 길에서 만났다. 그 예언자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들에는 그들 둘뿐이었는데, 30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움켜쥐고 열두 조각으로 찢으면서, 31 예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열 조각을 그대가 가지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 32 그러나 한 지파만은 나의 종 다윗을 생각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내가 뽑은 예루살렘 도성을 생각하여 그에게 남겨 두겠다.’” 12,19 이렇게 이스라엘은 다윗 집안에 반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 First Reading, 11:29-32; 12:19

29 Jeroboam left Jerusalem, and the prophet Ahijah the Shilonite met him on the road. The two were alone in the area, and the prophet was wearing a new cloak. 30 Ahijah took off his new cloak, tore it into twelve pieces, 31 and said to Jeroboam: “Take ten pieces for yourself; the LORD, the God of Israel, says: ‘I will tear away the kingdom from Solomon’s grasp and will give you ten of the tribes. 32 One tribe shall remain to him for the sake of David my servant, and of Jerusalem,the city I have chosen out of all the tribes of Israel.’” 12:19 Israel went into rebellion against David’s house to this day.

 

 

묵상) 다윗 왕이 실현한 이스라엘의 안정 체제는 솔로몬 시대를 거치면서 왕국의 분열이라는 심각한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유는 다윗 이후의 왕정이 주님의 뜻에서 점점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도 태초의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고, 우리 공동체도 나눔과 섬김의 초대 교회로 돌아가야 침체와 타락에서 보호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마르코 7, 31-37 

<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해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새 창조를 이루시고 만물을 회복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씀' 하시자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제대로 듣고 말하게 됩니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에파타!”곧“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 Holy Gospel of the Jesus Christ according to Saint Mark 7:31-37

31 Jesus left the district of Tyre and went by way of Sidon to the Sea of Galilee, into the district of the Decapolis. 32 And people brought to him a deaf man who had a speech impediment and begged him to lay his hand on him. 33 He took him off by himself away from the crowd. He put his finger into the man's ears and, spitting, touched his tongue; 34 then he looked up to heaven and groaned, and said to him, "Ephphatha!" that is, "Be opened!" 35 And immediately the man's ears were opened, his speech impediment was removed, and he spoke plainly. 36 He ordered them not to tell anyone. But the more he ordered them not to, the more they proclaimed it. 37 They were exceedingly astonished and they said, "He has done all things well. He makes the deaf hear and the mute speak."

 

 

묵상)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안수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안수하시며 '열려라' 하십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제대로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귀를 열어 주시면 우리도 하느님 말씀을 바르게 듣고, 하느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그를 고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손가락 하나로도 고칠 수 있는 분임을 그들은 믿습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그는 듣고 말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 사랑의 손길을 경험할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의 자비를 전하게 될 것입니다.

 

 

2018년 02월 09일 금요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조창수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Don't Worry Be Happy | Playing For Change | Song Around The World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

+  마르코 7, 31-37

  

1. 예수님께서 '열려라' 하시자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귀먹은 반벙어리는 듣고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귀먹은 반벙어리는 치유 받고 그동안 세상과 단절된 삶에서 소통할 수 있는 삶으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알리지 말라 하셨는데도 온 고을로 소문이 퍼졌습니까?

 

2. 나는 세상과 주님으로 부터 어떻게 단절되곤 합니까? 육체적으로는 건강하지만 영적으로 귀머거리에 반벙어리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을 닫고, 귀를 막고, 사랑을 전하지 않으며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소통할 수 없는 단절의 삶이 아닐까요? 나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싶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어루만져 치유하실 수 있도록 맡기며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해 보십시오.

 

 

 

 

 

Today’s Reflection :

 

Friday of the Fifth Week in Ordinary Time

1 Kings 11:29-32, 12:19 / Mark 7:31-37

 

We are told in the first reading today that because of the sins of Solomon and his following of false gods, the Lord has decided to split the kingdom into two – the southern kingdom of Judah and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Again in our Gospel text, Jesus is seen healing a deaf mute. However, he does so in private, away from the crowd, and tells the man to say nothing of it – his reputation is already preceding him. But the man speaks of it and the people praise Christ..

 

Prayer :

"Lord, fill me with your Holy Spirit and inflame my heart with love and compassion. Make me attentive to the needs of others that I may show them kindness and care.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mercy and peace that I may help others find healing and wholeness in you." Amen.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 (St. Michael Febres Cordero)

 

 

축       일  :   02월 09일

신       분  :   교육자

활동지역  :   에콰도르(Ecuador)

활동년도  :   1854-1910년

같은이름  :   마이클, 미가엘, 미겔, 미구엘, 미키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는 1854년 11월 7일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쿠엥카(Cuenca)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에서 싸운 유명한 레온 페브레스 코르데로(Leon Febres Cordero) 장군이며, 그의 아버지는 국내 정치 사안에 영향을 끼치던 프란치스코 페브레스 코르데로 몬토야(Francisco Febres Cordero Montoya)였다.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매력 있는 교양인이었으며 5개 국어에 능통했다. 성인이 태어날 즈음에는 쿠엥카의 신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의심할 필요 없이 성 미카엘의 성소는 그의 어머니인 아나 무뇨즈(Ana Munoz)와 신심 깊은 외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1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5명이 수녀가 되고 1명은 예수회 사제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학자 성인의 탄생을 위해 완벽한 가족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9살 때 성 미카엘은 1863년 요한 세례자 드 라 살(Joannes Baptista de la Salle, 4월 7일)의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가 쿠엥카에 세운 학교의 첫 학생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접하게 된 지성의 생활과 수도회의 겸손한 생활양식을 사랑했다. 그래서 후일에 기록하기를 “수도회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언젠가 거룩한 수도복을 입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언제나 수사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가족 중에서 사제가 나온다면 자랑스러워 했겠지만 평수사가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이해할 수 없어서 반대하였다. 수도생활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성 미카엘은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심하게 앓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어머니는 수사로서 아들의 성소를 인정하였다.

 

  1868년 3월 24일 그는 쿠엥카에서 수도회의 검은 수도복을 입으면서 미카엘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그 수도회 최초의 방인 성소자로 입회하여 수도복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모교에서 언어(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가르쳤으며, 일 년 후 키토(Quito)의 학교로 발령받았다. 그가 부임했을 당시 6년 된 학교에는 250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다시 6년 후 학생 수는 천 명을 넘어섰다. 이 시기에 성 미카엘 수사는 자신이 쓴 많은 책 중 첫 번째 책을 출판하였다.

 

  하지만 세속 과목들을 가르치고 집필하는 것은 그의 첫째가는 기쁨은 아니었다. 그의 첫 번째 기쁨은 어린이들의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다. 성 미카엘 수사는 자신의 가르침을 사도적 성소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대 사회의 가련한 상태에서 나의 거룩한 구세주께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모든 선에 있어서 나의 절대적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영혼의 승리에로 나를 부르신다. 내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막을 수 있을까?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에게 실망할까봐 두려워할 수 있을까? 사랑과 감사의 이 모범을 거부할 만큼 대담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맡는 모든 일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맡아야 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나를 채용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교육자로서 성 미카엘의 재능은 키토의 학교들의 공식 검열관으로 지정되면서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교육과 수도생활 중에 학자로서의 임무를 지속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성 미카엘은 교과서를 쓰고, 교리교재, 시와 그리스도교 영성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는 카스티야(Castilla) 에스파냐어 연구에서 특출한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 중 몇 권은 에콰도르의 모든 학교에서 필수 교재가 되었다. 결국 그는 1892년 에콰도르 학술원 회원이 된 후 에스파냐 왕립 학술원, 프랑스 학술원, 베네수엘라 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07년 3월 성 미카엘은 프랑스어로 된 더 많은 교과서와 다른 책들을 번역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가게 되었다. 프랑스 시민사회와 종교의 불안한 기운은 수도회의 작품을 프랑스 외부에서 지속시킬 수 있도록 드 라 살 연구소(De La Salle Institute)의 문서들을 에스파냐어로 번역해야 할 급박한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 미카엘은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4월) 앓게 되었고, 병이 낫자마자 파리의 세브르 거리에 있는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내 방이 있고, 책이 있으며, 근처에 성당이 있다. 이것이 완벽한 행복이다.”

 

  7월에 그는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벨기에의 브뤼셀 근교에 있는 모원으로 이동하였으며 벨기에의 총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더 많은 집필을 위해 유럽에 계속 머물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성 미카엘은 번역작업에 몰두하다가 건강에 무리가 와서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근처의 청원자 숙소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몇 달 동안 에스파냐어를 가르쳤다. 1909년 7월 26일 바르셀로나에서 시민혁명이 시작되어 시민들이 수도원을 공격하고 교회 재산을 파괴하여 모든 수도자들에게 큰 근심이 되었다. 그로 인해 1910년 1월 감기에 걸린 성 미카엘 수사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1910년 2월 9일 동료 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종하였다. 교사와 학자로서 성 미카엘 수사의 명성은 그의 성덕과 일치했다. 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그에 대한 대중신심이 생겼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그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현존을 강하게 느끼는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성 미카엘의 첫 전기 작성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에콰도르의 형제는 시간이 조금 흐르면 변질되는 외적 아름다움의 은총을 받지는 않았다. 키는 컸지만 그의 자세는 어렸을 때부터 구부정했다. 용모는 어두웠고 여위었으며, 금욕 실천과 지병으로 인한 주름살이 깊은 고랑을 이루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 표정은 그의 영혼과 하느님의 은총의 조명으로 인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평화롭고 친절한 본성에서 나오는 온순함이 흘러넘쳐 반향된 것이다. 그의 매우 가는 입술은 항상 지속적이고 은총 가득한 웃음을 지니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눈은 가장 순진한 어린이의 눈빛이었으며,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설명할 수 없는 평화에 기인할 수밖에 없는 고요함과 기쁨으로 인해 반짝거렸다. 그의 생김새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표현은 조용하고 침착한 정신이 그 밑에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성 미카엘의 유해는 1936년 스페인 내전 중에 에콰도르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1937년 2월 5일 에콰도르에 도착했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짧은 시간 안에 키토에 있는 그의 묘소는 성지순례의 중심이 되었다. 정부는 그를 기리기 위해 기념우표를 발행하였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공공 공원에 기념물을 세웠다. 1955년 6월 4일 3만 명의 학생이 참여한 거대한 행진 후에 동과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성 미카엘은 1977년 10월 30일 동료 수사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Mucianus Maria Wiaux, 1월 30일)와 함께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10월 2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에콰도르 최초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홈

 

 

 

 

매일미사_2018년 02월09일(녹) 연중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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