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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의 성 요한 (Saint John of God)

천주의 성 요한 (Saint John of God)


축 일 : 3월 8일

신 분 : 설립자

활동 지역 : 포르투갈(Portugal), 스페인(Spain)

활동 년도 : 1495-1550년

같은 이름 :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천주의 성 요한(Joannes de Deo)은 1495년 3월 8일 포르투갈 몬테모르오노보(Monte-Mor O Novo)에서 태어났다.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8세 때에 한 순례자를 따라 가출하였다. 순례자를 따라 에스파냐까지 간 그는 오로페사(Oropesa)라는 도시에 사는 마요랄(Mayoral)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마요랄의 집에서 글공부와 허드렛일을 익혀 가면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학교 공부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하며 양치기 목동으로서 28세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자 그는 오로페사 백작의 군대에 편입되어 에스파냐를 방어하기 위해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에 요한은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방종한 생활을 했으며, 자신이 담당하는 전리품이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해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군대에서 추방당했다. 그 후 예전처럼 양치기 목동 생활을 하던 그는 다시 터키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비엔(Vienne)을 방어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지원하였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군대가 해체되자 요한의 군대 생활도 끝났다.


그 후 그는 감사기도를 드리기 위해 에스파냐의 북서부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점으로 그는 많은 시간을 묵상과 기도로 보냈다. 그러던 중 그는 포르투갈의 영토로서 전략적인 요새였던 북아프리카의 수타 지역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떠났으며 그곳에서 잠시 생활하였다. 수타에서 돌아온 후 요한은 그라나다(Granada)의 엘비라(Elvira) 성문 옆에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책과 십자가, 성물 등을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539년 1월 20일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축일에 성 요한은 아빌라의 성 요한(5월 10일)의 강론에 큰 감명을 받아 회심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런 그의 생활을 본 주변 사람들은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여겨 왕립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그는 모진 시련을 겪었다. 성 요한은 퇴원한 후 과달루페의 성모 마리아 성지를 순례하고 그곳에서 병원 운영과 병자 간호에 필요한 기본적인 일들을 배웠다. 그라나다로 다시 돌아온 성 요한은 그라나다의 주교와 베네가스(Venegas)라는 은인의 도움으로 1539년 12월말에 루체나(Lucena) 가도에 처음으로 '자선의 집'을 개원하였다. 그는 환자들이 따뜻하고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지내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의 활동이 가끔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길거리의 창녀와 부랑자들을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540년에 에스파냐 국왕의 고문이며 그라나다를 관할하고 있던 투이(Tuy)의 주교 라미레스(Ramirez)는 성 요한을 만찬에 초대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천주의 요한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하사하였다. 그의 높은 성덕과 헌신 덕택으로 수많은 재산가와 왕족들이 그의 사업을 위하여 많은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성 요한은 심장 울혈증과 관절염, 안구 이상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쉬지 않고 일하였다. 하지만 결국 1550년 3월 8일 자신이 태어난 날,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선종하였다. 천주의 성 요한은 1630년 9월 21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886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그를 병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으며, 1930년 8월 28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모든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천주의 성 요한은 살아 있을 때 직접 수도회를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서 후에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교황 비오 5세는 그를 일컬어 “교회의 뜨락을 온전히 꾸미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한 송이 꽃”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설립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1572년 1월 1일 교황 비오 5세의 승인을 받아 교황청 직속 수도회로 설립되었다.

(가톨릭 홈)

 

환자의 수호성인 천주의 성 요한




천주의 성 요한(1495-1550년)은 포르투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요한 시데다이지만 그가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13년 동안 가난한 사람, 정신 질환자, 박해받는 이들, 창녀, 노인, 고아, 과부 등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것을 보고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라 하여 천주의 요한이라 불렀다.어린 나이에 순례자를 따라 고향을 등지고 목동, 군인, 노동자, 책장수 등의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40세에 아빌라의 요한 신부의 강론을 듣고 삶의 전환을 맞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정신병원에 수용되기까지 한 그는 요한 신부의 충고를 듣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구걸을 하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집을 마련했다. 그 뒤 그의 신심에 감동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세웠다.


천주의 성 요한은 현대의학의 선구자이다. 그는 환자에게 개인 침대를 제공하고 환자들을 질환에 따라 분류시키는 생각을 최초로 한 사람이다. 그는 수용소를 개방해서 행려자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준 현대 구빈원의 창시자이다. 그가 죽은 뒤에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가 창설되어 세계적인 수도원이 되었다.천주의 성 요한은 병원, 환자, 간호의 수호성인이며, 축일은 3월 8일이다.


 

[금주의 성인]

천주의 성 요한(St. John of God, 3월 8일)


고통 중에도 고통 보듬어

1495~1550. 포르투갈 몬테모로노바 출생.

병자들과 간호사의 수호성인.


성인은 포르투갈 농작물 판매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살 때 군대에 들어간 그는 스페인과 프랑스 간 전쟁에 참여한 후 다시 고향 포르투갈로 돌아왔지만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는 슬픔을 삼키며 한 평생 하느님 섬기며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한다.그는 여러 지방을 떠돌며 책 파는 일을 시작했다. 신앙서적을 파는 일이 하느님을 알리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한 소년에게 그라나다 지방으로 가면 예수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곧 그라나다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요한 데아빌라 신부의 강론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그동안의 삶을 참회하며 광장 한 가운데서 사흘밤낮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를 큰 소리로 외쳐댔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그는 자신의 소명이 아픈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입원한 병원에서 보조 간호사로 봉사하며 아픈 이들을 돌봤다. 또 쉼터 책임자로 일하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보살폈다. 성인은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고 온갖 종류의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의 헌신적 활동에 감탄한 이들은 그의 쉼터를 돕기 시작했고, 쉼터 운영에 필요한 물품들을 기증했다.


그 역시 관절염, 심잠병 등으로 고통받았지만 쉬지 않고 일했다. 몸이 쇠약해진 그는 1550년 마루바닥에서 무릎 꿇고 기도를 바치다 숨을 거뒀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그는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886년 교황 레오 13세는 성인을 아픈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1930년 교황 비오 11세는 모든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의 정신을 기리는 천주의 성요한 수도회를 설립했고 교황 비오 5세는 1572년 수도회를 공신 승인했다. 우리나라에는 1958년 진출했으며 광주대교구에 한국관구 본부를 두고 있다.


[평화신문, 제1009호(2009년 3월 8일), 박수정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상)

사진말 -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된 천주의 성요한 대리석상(피렌체의 조각가 필리보 델라 발레의 작품)



창설자와 역사


1538년 1월 어느날 스페인의 그라나다, 당시 스페인에서 유명한 설교가로 많은 이들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회심시켰던 아빌라의 요한은 장차 가난한 병자들의 수호자로 나설 한 사람의 평신도를 움직였다.


강론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혼의 깊은 곳을 뒤흔들어 놓은 종교적 회심의 효과는 놀라웠다. 거의 미쳤다 할 만큼 광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그 영혼의 충격은 급기야 천주의 성 요한으로 하여금 정신병원에 수용되게 만든다.하지만 쇠사슬에 묶인 채 채찍질과 학대로 시작된 치료가 끝난 후 40대 중반의 그는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다른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그것은 훗날 병자들의 수호자,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된 천주의 성 요한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소명을 이루기 시작한 첫 걸음이었다.


1495년 3월8일 포르투갈의 몬테모로-노보라는 곳에서 태어난 요한 시데나. 그는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약 13년 동안 가난한 사람, 정신질환자, 박해 받는 이들, 노인, 고아, 과부 등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봄으로써 '천주의 요한'이라 불리웠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무기를 들고 참된 신앙을 위해 전장으로 나서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종교개혁의 회오리 속에 가톨릭 교회는 혼돈에 휩싸여 있었고 이슬람교도들이 서방을 공격해왔다. 8살 때 이름없는 순례자를 따라 집을 나서 목동, 군인, 노동자, 책장사를 전전하며 삶의 의미와 자신의 소명을 찾아 헤맸던 그는 그러나 무기를 들기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주목했다.


당시 병원이라는 것은 병자들을 치유해 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빨리 죽도록 해 고통을 덜어주고 건강한 시민들로부터 병자들을 격리시키는 것이 임무인 듯 보일 정도였다. 천주의 성 요한은 당시 병원으로부터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 거지들에 대한 따뜻한 말과 선행들이었다. 자유롭고 개방된 사랑의 정신에 바탕을 둔 따뜻한 '환대' 바로 그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1539년 가을에 집을 빌려 아무런 조건 없이, 한 마디 물음도 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치료하기 시작했다. 공원에 버려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혹은 사설 수용소에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등에 업어 나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와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 요한을 돕기 시작했고 1550년 3월 8일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동료가 다섯이 됐고 후에 그들에 의해 수도회가 탄생해 오늘도 그와 같은 정신으로 하느님의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천주의 성 요한은 그후 1630년 9월 21일에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690년 10월 16일에 교황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됐다.


창립자가 세상을 떠난 후 20년 뒤 교황 비오 5세는 1572년 1월 1일 정식 수도회로 인준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오늘날 47개국에서 43개의 종합병원과 26개의 정신병원, 14개의 간호 진료소, 26개의 노인 요양원, 6개의 만성질환자 병원, 신체 장애인과 정신지체인을 위한 16개의 서비스 센터, 정신 장애인을 위한 32개의 센터와 서비스 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한국에는 1958년 아일랜드에서 5명의 수도자가 광주에 진출해 1960년부터 이동 진료 및 가정 방문을 시작해 현재는 광주에서 정신과 병원, 일반의원, 알콜상담치료센터, 호스피스 병동, 가정방문 활동, 광주 공원 노인복지회관을 운영하며 춘천 시림 복지원과 서울의 사회복지법인 늘푸른나무 등을 운영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5월 26일, 박영호 기자]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하)


영성과 사도직 활동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께 봉헌돼 정결하고 가난하며 순종하며 환대의 약속으로 자비로운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른다. 이런 삶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며 복음서의 내용대로 모든 이에게 선익을 베풀고 온갖 종류의 질병을 치유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 동정심이 가득하고 자비로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나라는 50개국. 43개의 종합병원과 26개의 정신병원 및 서비스 시설, 14개의 간호진료소, 26개의 노인 요양원, 6개의 만성 질환자를 위한 병원, 신체 장애인과 학습 장애인(정신지체인)을 위한 16개의 서비스센터, 정신 장애인을 위한 32개의 센터와 서비스 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현재 총 1440명의 수도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종신서원수사 20명, 유기서원수사 4명, 수련자 1명이 있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58년. 아일랜드에서 파견된 5명의 수도자가 광주에 진출해 1960년부터 이동진료 및 가정방문을 시작했으며 천주의 성 요한 의원을 개원해 본격적인 의료 및 구제 사업을 시작했다.천주의 성 요한 정신병원은 지난 1973년3월 정신과 진료실을 개설한 이래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개방적인 병원 운영과 정신보건전문 요원에 대한 전문교육, 환자의 상태에 따른 다양한 단계의 치료적 환경과 프로그램으로 선진 치료 기법을 도입했으며 가정적인 치료 환경 조성을 통해 정신질환자의 치료 및 재활에 기여해왔다.


천주의 성 요한 의원은 1차 외래진료기관으로서 전문의로 구성된 내과, 피부과, 소아과, 방사선과 등의 진료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첨단 진료 지원 부서를 갖춘 중앙 치료 센터와 임상병리실, 건강검진실, 초음파실, 위 내시경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호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1997년 5월 호스피스 입원 병동을 개설한 천주의 성 요한 호스피스 센터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입원실, 주간이용, 가정방문 서비스의 3단계 호스피스 서비스 프로그램을 시작해 모범적인 호스피스 활동을 펼치고 있다.


노인복지활동과 관련해 성 베네딕도 메디 노인센터는 2000년 개관해 노인 치매 병원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으며 치매 노인들의 수용 보호 및 치료를 위한 입원실과 경증 치매 노인들이 낮 동안 치료를 받는 주간이용시설, 일시적으로 치매노인을 돌보는 단기보호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


또 광주 공원 노인복지관은 노인 복지서비스 기관으로 노인들의 건강 증진과 사회 교육, 후생복지, 상담, 재가 복지 및 고령자 취업 알선과 경로당 활성화 사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담양 대건센터는 노인 주간 및 단기 보호사업으로 혼자 일상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노인에 대해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 사랑의 식당에서는 광주 공원을 찾거나 노인복지회관을 이용하는 노인들에게 매일 무료로 점심을 제공해 주고 있다.


춘천 시립복지원은 일정한 주거가 없는 부랑인에 대해 시설에 일시 보호, 선도 귀가 조치 및 수용 보호함으로써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를 유도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정신지체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법인으로 늘푸른나무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앞으로 수도회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말기질환 환자들을 돌볼 예정이다. 현재 중국 길림성 연길에 중국 제2인민병원과 합작으로 25병상 입원시설과 낮병원을 운영하는 국제합작 호스피스병원의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데 각종 허가를 기다리며 건축 설계에 들어갔다. 또 미래 계획으로 가난한 노인들이나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삶의 질 향상과 건강을 돌보기 위한 요양 시설 및 장애인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9일, 박영호 기자]

 

[수도 영성]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약한 사람들과 함께 약한 사람들이 되어

이광수 미카엘(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수사)


하느님을 환대하듯이


5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가난과 질병으로 아픔을 겪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수도회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천주의 요한 성인(1495-1550년)이 삶으로 보여준 ‘호스피탤러티(Hospitallty 환대정신)’를 현시대 안에서 드러내며, 과학의 발전으로 진보하는 의료와 건강에 대한 관심과 기술로써 사람을 보살피고. 특별히 ‘인간화’에 관심을 두고 헌신하는 것을 수도회의 사명임과 동시에 존재양식으로 삼는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 특히 도움이 필요하고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맞아하고 환영하신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의 영성은 바로 이러한 분들을 환대하고 맞이하시는 분으로서 하느님을 맞이한다. 기본 욕구조차 충족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환영하며 섬기는 것이 바로 환대정신으로 살아가는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영성이다. 거처가 필요한 사람, 음식이 필요한 사람, 보호가 필요한 사람, 치료가 필요한 사람…. 이것이 수도회 형제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표현하는 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회헌은 우리의 영성을 이렇게 명시한다. “환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언제나 진지하게 재현하고 자비의 행위로 그 마음을 드러내도록 갈구한다. 약한 사람들과 함께 약한 사람들이 되고 그들을 왕국의 특혜자로 보살펴주며 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전인적 구원의 신비를 선포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그들을 위해 본회 형제들은 생명을 바친다.”


가난한 이에게 헌신하는 ‘환대’ 서원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교회 안에서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보살피며 봉사하는 사명을 수행한다. 수도회는 병자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지니신 동정심 많고 자비로우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 온갖 사물 위에 주님을 사랑하고자 했으며 다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사랑과 선하심 때문에,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에게 선과 애덕을 베풀고, 이들의 궁핍함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지닌 창설자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에게 환대라는 특별한 서원으로 헌신한다.


수도회 형제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과 대상자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셨는지를 언제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비로운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마음을 드러내며, 전통적으로 기쁘게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펴 줌으로써 환대정선을 실천하고, 환대정신을 통하여 겸손하고 인내심 있고 책임감 있는 봉사와 인격에 대한 존엄성과 성실성, 이해와 자비, 극기와 고뇌하는 생활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고 표정으로 삼는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형제들의 생활에서 중대한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는 것이다. 수도회 회원들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염원하며,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각별하게 선과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병자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하는 교회 전통을 이어받아 실천하는 자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들에게 보여주신 기적적인 치유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징표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치유의 카리스마는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행하고, 수도회 설립 초창기부터 병든 환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보살핌이 환대정신의 필수행위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가난한 사람, 병자, 궁핍한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 공동제의 관심은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형제들의 헌신에서 잘 드러나며 오늘날까지 수도회의 전통이 되어왔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병들거나 궁핍한 이들을 돌보는 활동은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형제들이 실천하는 기본적인 생활의 핵심이다. 그래서 ‘환대서원’을 통하여 환자와 대상자를 돌볼 수 있게 준비하고, 그들에게 펼요한 모든 봉사행위를 하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장 비천한 일을 통해서도 생명까지 바칠 각오로 호스피탤러티를 실천하여야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천주의 성 요한수도회 형제들은 그들의 전통 안에서 변함없이 지속되어 온 관심의 초점을 도움이 필요하거나 병든 사람한테 맞춘다. 이러한 관심의 초점이 언제 어느 순간에도 명확히 드러나도록 노력하면서, 함께하는 협조자(직원)들이 수도회 형제들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해야 함을 느끼도록 호스피탤러티 사명에 투철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삶을 수도회 조직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의복, 집과 의약품이 결여된 사람과 여러 가지 사유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질병으로 건강이 극도로 약해진 사람들에게도 환대정신을 펼치게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을 받아들여 보살필 수 없는 한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형제들은 기도 중에 그들을 특별한 자리에 두고 기억하면서,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세상을 실현하고자 활동하는 모든 사람과 일치할 것을 의식한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모토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이다. 이 모토 안에는 환대정신이 충만하게 깃들어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 정신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여 우리 영혼 안에 굉장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 수도회 안에는 ‘환대, 동정, 존경, 정의, 탁월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가 있다. 이 공통의 가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초점을 두는 믿음과 인류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환대정신을 통하여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향하여 민감함을 보이고, 그들의 고통을 완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발전과 성장을 가져올 수 있게 한다. 또한 협조자들과 협력하는 개방된 자세와 대화로 도움이 필요한 분들과 상호이해를 하며, 인간화를 통하여 타인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갖는다.


[경향잡지, 2007년 2월호]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 천주의 성 요한


하느님을 위해 뜨겁게 자신을 불사른 성인들의 생애를 보면 그들은 대부분 하느님을 강렬하게 느끼는 ‘어떤 특별한 순간’을 겪는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완전히 승복하는 회심의 순간, 주위 사람들의 오해를 사면서도 그 전에 살았던 삶의 방식을 벗어던지고 마는 전환의 시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그 은총의 순간은 사람마다 각각 다른 시기에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이뤄졌다.


병자와 간호인들의 주보성인이며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의 창설자인 천주의 성 요한(1495-1550)은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하느님을 체험했다. 그 후 그는 선종할 때까지 10여년의 짧은 세월동안 자신의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남김없이 베풀었다.


1495년 포르투갈에서 출생한 요한은 8세에 집을 떠나 목동, 군인, 막노동자, 책 판매업자를 전전하면서 방랑생활을 했다. 그는 45세가 되는 해 성 세바스티아노 축일에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요한 데 아빌라 신부의 강론을 들으면서 극적인 회개의 순간을 맞았다.


사람들은 성당 밖으로 뛰쳐나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통회하는 요한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를 왕립 정신병원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곳, 쇠사슬에 묶여 벌거벗겨진 채 회초리로 매를 맞는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는다. 병원에서 나온 요한은 즉시 가난한 이, 장애자, 병자, 부랑인, 고아 등 불쌍한 이들을 돌보기 위한 자선의 집을 준비했다. 돈도 없고 병자를 돌보기 위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중년의 요한은 이들에게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마련해 주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매일 구걸을 다니는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요한은 또 왕립 병원에 화재가 났을 때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해내기도 했고 1550년 겨울에는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병을 얻어 결국 이로 인해 선종하게 됐다.



‘육(肉)을 통하여 영(靈)으로’,


육체의 봉사를 통하여 영혼의 선익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요한은 이 말을 자주 사용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인간의 육신을 취했고 지상 생활에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됐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한은 또 “우리 주님을 자주 기억하고 그분의 수난을 염두에 두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 열과 성을 다하시오. 그대의 살이라도 베어 먹이겠다는 각오를 세워두시오”라는 훈시를 남겼다. 이 짤막한 훈시에는 죄인과 버림받은 이들에게는 위로의 벗이었고, 병든 이들에게는 치유자였던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라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살았던 요한의 정신이 담겨 있다.


‘육을 통하여 영으로’, 이 말에는 또 한 가지 요한의 깊은 영성이 숨어 있다. 요한은 모든 사람이 고개를 돌리는 정신질환자와 병자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인 존엄한 인간성을 발견했다. 따라서 그들을 극진히 섬기고 보살피는 것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됐고 곧바로 기도로 이어졌다. 즉 요한에게 ‘의료봉사(Hospitality)’는 육신의 아픈 곳을 치료해 주는 단순한 의료 행위라는 개념을 뛰어넘는 전인적 ‘인간화’를 뜻한다.


이 같은 요한의 영성은 정결, 청빈, 순명의 3대 서원 외에 의료봉사 서원을 발하는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본래 요한은 수도회를 설립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이 평범한 평신도로서 활동했으며, 수도회는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태동된 것이다. ‘천주의 요한’이라는 이름은 그가 탁발을 할 때 ‘천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시오’라고 외쳤기 때문에 그라나다의 주교가 하사한 이름이었다.


오랜 세월의 방랑 끝에 늦게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요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적다고 생각한 만큼 더 열렬히 사랑에 투신했다. 그리고 그가 쏟아 부은 사랑은 땅에 묻힌 한 알의 밀씨가 되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평화신문, 1996년 2월 11일, 남기은 기자]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천주의 성 요한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불린 천주의 성 요한. 교황 비오 5세는 그를 『교회의 뜨락을 온전히 꾸미는데 없어서는 안될 한송이 꽃』이라 칭했다.


모든 이를 벗으로 정성껏 돌봐

어린시절 순례자 따라 가출

인생의 본질 깨닫는 계기돼


1550년 3월 8일 스페인 남부 도시 그라나다에서는 아침이 오자마자 한 부음(訃音)이 날아 들었다.


『천주의 성 요한이 돌아가셨다.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본명 후안 시다데(Juan Cidade), 1540년 투이(Tuy)의 라미레스(S. Ramirez) 주교가 경의의 표시로 내린 「천주의 성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던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임종했다.


심한 울혈증과 관절염 그리고 안구 이상 등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쉬지 않고 자신이 세운 「자선의 집」에 기거하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과 구호 물품을 구걸하는 등 이웃을 위해 살았던 그였다. 선종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들은 그의 동료들과 병원 환자들, 그리고 그가 돌봤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집 앞에는 군중이 몰려들었고 그들중 대부분은 하류 계층에 속하는 어려운 이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 아버지가 우리들 곁을 떠나버렸으니 이제는 누가 우리를 보살펴 준다지?』


생존시 직접 수도회를 창설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그의 모습을 보고 따르던 이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도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낳았던 천주의 성 요한(1495∼1550).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그를 가리켜 『교회의 뜨락을 온전히 꾸미는데 없어서는 안될 한송이 꽃』이라 칭했다.


그가 보였던 것은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철저하게, 질서 정연하게 정비돼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거칠기만 했던 사회에 피웠던 진정한 사랑의 불꽃이었다. 그에게는 거지들이 그냥 거리에 방치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또한 병자들이 병원에 실려와 인간적 대접을 받지 못한채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도 하느님 뜻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적 질서로 정비된 국가였으나 「카리타스」(Caritas)라는 진정한 사랑의 정신이 결여돼 있음을 보았고 가진 것 없고 버려진 이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 효과적으로 돌보는 것이 거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자선의 집을 통해 가난한 사람의 벗이 됐던 천주의 성 요한은 자신에게 오는 이들은 어떤 이든지 깨끗한 환경 속에서 하느님의 어린이와 같이 다루며 몸의 상처를 봐주고 부스럼과 딱지들을 씻어내고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며 충분히 먹고 간호를 받을 수 있도록 돌봤다. 그에게 있어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어린이들이었다.


1495년 3월 8일 포르투칼 몬데모르오노보(Monte-Mor O Novo)에서 태어난 천주의 성 요한은 8세 되던해 자신의 집에서 거주하던 한 순례자를 따라 가출한 어린 시절을 갖고 있다. 비교적 중산층에서 자랐던 요한은 집안 사업이었던 농작물 판매상을 물려받아 편안하면서도 평범한 삶을 살아갈 운명처럼 보였지만 이 사건으로 그의 인생 진로는 바뀌게 된다.


요한을 데리고 나온 순례자는 그를 국경 너머 스페인에 있는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오로뻬사 백작의 영지까지 대략 300km를 여행하여 백작을 섬기고 있는 측근인사 돈 프란치스코 데 에루즈에게 키우도록 맡겼다. 페르난도는 자기 집에 요한이 살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사춘기가 되자 「마요랄」이라 불리던 목양 감독관의 감독아래 목동으로 일했다.


1523년에 스페인황제 까를로 5세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양측 군대는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푸엔타라비아에서 접전을 벌였고 요한은 오로뻬사 군대에 편입, 스페인 방어를 위해 진군했다. 2년동안 지속된 장기전 속에서 전세는 스페인의 승리로 거의 굳어져 가는 상황이었고 이 시기에 훗날 자신의 장래에 영향을 미칠 커다란 두 사건을 경험한다. 덧없고, 쉽게 무너지기 쉬운 인생의 본질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요한이 프랑스 국경 근처에서 마초징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중 말등에서 떨어지며 일어났다. 당시 떨어진 충격으로 의식을 잃었던 그는 자신이 적의 손에 잡혀 죽을지도 모를 심각한 위험상태에 놓여 있음을 깨달았고 공포와 절망 가운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 구원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점차 머리가 맑아지면서 다행히 아군의 진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남은 생애 내내 자신이 구출된 것을 이같은 마리아의 중재 덕분으로 여겼다.


두 번째 사건은 요한이 병영에서 노획물들을 지키는 야간보초 임무를 맡던 때였다. 어느날 그가 보초를 서는 동안 지켜야 할 물건들을 도둑 맞았고 요한의 직속상관은 이같은 도난 사건에 격노, 사형을 명했으나 요한이 교수대에 올라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을 때 근처를 지나던 한 장교의 판결 취하 요청으로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곧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그는 감사 기도를 드리기 위해 스페인 북서부의 꼼뽀스텔라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요한은 많은 시간을 묵상과 기도로 보낼 수 있었던 이때의 성지순례는 앞으로의 인생에 새 장을 여는 출발점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30일, 이주연 기자]



(사진설명)광주에 있는 천주의 성 요한 병원 전경.수도회는 전 세계에 200여개의 병원을 열고, 장애인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치료활동을 벌이고 있다.




병자 치유의 카리스마 실천

정신병자로 오해받아 병원서 채찍질당해

병자 정성껏 돌보기 위해 자선의 집 마련


스페인 콤포스텔라로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천주의 성 요한은 더욱 기도와 묵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 수타 지역으로 떠나게 됐고, 여기서 잠시 생활하다 그라나다로 돌아와 엘비라 성문 옆에 성물 가게를 열고 책과 십자가, 성물 등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후 천주의 성 요한은 본격적인 회심의 생활로 접어드는 전기를 마련한다. 1539년 1월 20일 성 세바스티아노 축일을 맞아 「순교자들의 암자」 성당을 찾은 요한은 성 세바스티아노가 보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과 용기에 감명을 받고 성인전을 여러 차례 탐독하면서 보다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의 변화된 삶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여겨졌다. 왕립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모든 시설이 열악한 이곳에서 작은 방에 갖혀 옷을 벗긴 채로 모진 매를 맞는 등 치료라고 할 수 없는, 학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아야 했다. 기둥에 묶어놓고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미치광이를 치료하는 가장 일반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던 당시였다.


그같은 비참한 생활 안에서도 요한은 다른 환자들을 배려했고 그들이 좀 더 편안하고 양호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병원에서 퇴원한 요한은 이미 45세의 나이에 접어든 상황이었지만 자신이 해야할 어떤 일에 대한 의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퇴원과 함께 영적 지도자인 아빌라의 요한 신부를 찾아간 그는 요한 신부의 지도로 1개월간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졌고 이후 과달루페 성모성지로 순례를 떠났다. 그곳에서 요한은 3개월 동안 예로니모회 수도회들이 운영하는 병원 및 의학 학교에 머무르며 병자 간호에 필요한 기본적인 일들을 배웠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의 병원들이 오늘날 볼 수 있는 병원들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명색은 병원이었으나 병을 치유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병을 전염시키고 키우는 곳이라 설명될 수 있었다.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울 정도의 지저분함과 더러움의 대상이었고 의학적 지식의 측면도 형편없을 정도였다.


요한이 입원했던 그라나다의 왕립 병원도 별 다를 바가 없어 병자들과 노숙자들과 떠돌이들이 북적거리고 있었고, 진심어린 간호나 봉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불쌍한 이들은 더욱 더 불쌍하게 됐고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임종을 재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39년 12월말 요한은 모아진 돈과 지원금 등으로 루세나 길(Lucena-Gasse)에 「자선의 집」을 개원했다. 베네가스(Venegas)라는 은인의 도움으로 빌린 2층 건물이었다. 또 그라나다의 주교는 침대와 담요를 사도록 비용을 지원했다. 요한이 병자들을 돌보는 방법은 당시 병원 사정을 감안할 때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가난하거나 범죄자이거나 무일푼이거나 사기꾼이거나 불량배를 가리지 않고 환자들을 동등하게 대했는데 이러한 모습에 대해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고 한편 영혼의 소리를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그는 자선의 집에 기거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거리에 나가 음식과 구호 물품을 구걸했고 후원자들을 찾아 그라나다외 여러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세사 공작 부인은 요한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며 평생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요한은 또 잠시 그라나다에 머물고 있던 당시 왕국의 총비서 돈 세바스찬 라미레즈 주교에게 병자들을 위한 도움을 청했고 이 주교는 상편에서 언급됐듯 요한에게 「천주의 요한」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하사했다. 수도자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수도복을 입도록 명하는 것과 함께.


1546년 말경 안톤 마르틴과 페드로 벨라스코에 의해 그라나다 고멜레스 언덕에 두 번째 병원이 세워지는 것을 지켜본 요한은 1550년 3월 8일 「철저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는 그의 업적을 마감한다. 1630년 9월 21일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된 그는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시성됐다.


교황 레오 13세는 병자와 병원을 위한 천상의 수호성인으로, 교황 비오 11세는 1930년 병자를 돌보는 사람들과 그들의 협회들을 위한 천상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또 교황 비오 12세는 1940년 그라나다를 위한 제2의 수호성인으로 정했으며 1953년에는 스페인의 소방수를 위한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한편 천주의 성 요한의 정신에 충실하면서 시대적 표징에 일치하는 방법으로 병자 치유를 위한 카리스마를 실천하는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1571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공동체로 인정됐고,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정식 수도회로 승격됐다. 수도회는 특히 개발도상국 등 전 세계에서 200여개의 병원을 열고 있으며 장애인 노인 노숙자 만성병자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치료와 각종 사회복지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5년 2월 20일, 이주연 기자]


 

가톨릭 사회복지의 실천자들 - 천주의 성 요한


천주의 요한 성인은 1495년 포르투갈의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8세의 어린 나이에 어느 이름 없는 순례자를 따라 고향을 등지고 목동, 군인, 노동자, 책장수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얽매임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와중에 성인은 아빌라의 요한 신부의 강론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습니다. 이때의 종교적 회심은 가히 미쳤다고 할 정도로 광적인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으로 말미암아 성인은 정신병원에 수용됩니다.


성인은 그렇게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치료란 말할 필요도 없이 채찍질을 동반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포함합니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치료방법과 학대에 고통을 겪은 성인은 쇠사슬에서 풀려난 즉시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다른 환자들을 돌보아 주기 시작하고 정신병원 안에서 소외된 채 적대감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환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불쌍한 이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따뜻하고 친절한 장소,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열려있는 따뜻한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지니게 됩니다.


이후 성인은 병원에서 나온 다음 몇몇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세웁니다. 당시의 병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병원이 아니라 환자들뿐만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노인들, 어린이들 등이 함께 있는, 복지원에 가까운 병원이었습니다.


성인은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습니다. 환자들을 질병에 따라 분류하여 수용하고,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침대를 따로 쓰도록 합니다. 또한 성인은 환자들뿐만 아니라 집 없이 떠도는 노인과 고아, 과부 등을 위해서 집을 마련하고 비록 보잘것없는 집이지만 인간답게 넉넉한 자리를 잡고 깨끗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쉴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이리하여 성인은 원래 이름이 요한 시데다이지만, 13년 동안 가난한 사람, 정신 질환자, 박해받는 이들, 창녀, 노인, 고아, 과부 등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핌으로써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라는 의미로 ‘천주의 요한’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천주의 요한 성인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고, 특별히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환대를 통해 가톨릭적 사회복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환대는 단순히 주인이 손님을 집안에 맞아들이는 개념에 그치지 않습니다. 환대란 주인의 입장과 방식을 따르도록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자신의 것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선사하는 것입니다.


[2015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가톨릭마산 7면, 박철현 미카엘 신부(마산교구 사회복지국장)]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천주의 성 요한 수도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244-248쪽.

■ 요셉 봐이스마이어 외 저, 전헌호 역, 교회 영성을 빛낸 수도회 창설자: 근세교회 - '천주의 성 요한과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서울(가톨릭출판사), 2002년, 69-83쪽.

■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천주의 요한', 서울(으뜸사랑), 2014년, 157-163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요한, 천주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581-6583쪽.

■ 한상렬 저, 사랑의 투사 천주의 성 요한, 서울(성황석두루가서원), 1990년.

■ 헤수스 알바레스 고메스 저, 강운자 편역, 수도생활 역사 III - '천주의 성 요한과 수도회', 서울(성바오로), 2005년, 98-106쪽.

■ B. 오그라디 저, 성염 역, 사랑의 투사 천주의 성요한, 서울(성바오로), 2008년.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천주의 성요한 수도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70-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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