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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아 산타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르

성녀 마리아 아 산타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르

(Saint Mary a santa Euphrasia Pelletier)


축 일 : 4월 24일

신 분 : 수녀, 설립자

활동 지역 : 앙제(Angers)

활동 년도 : 1796-1868년

같은 이름 : 메리, 미리암, 에우쁘라시아, 에우프라씨아, 유프라시아



성녀 마리아 아 산타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르(Maria a santa Euphrasia Pelletier)는 1796년 7월 31일 프랑스 서부 방데 연안의 누아르무티에(Noirmoutier)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부모는 방데 전쟁을 피하여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18세 되던 1814년 10월 20일 애덕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1825년에 투르(Tours)에 위치한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앙제에 수녀원을 설립해 달라는 앙제 주교의 요청을 받고 파견되어 '앙제의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원'을 성공적으로 설립한 뒤에 투르로 돌아왔다. 그러나 앙제 수녀원이 운영상 많은 어려움을 겪자 다시 앙제로 가서 수녀원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가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자기 수녀회의 구조를 크게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나 수녀원 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녀는 야심이 많고 순종하지 못한다는 비난과 함께 '능력은 있으나 한 나라를 다스려야 적성이 풀릴 사람'이란 평을 받았다. 마침내 그녀는 앙제에 '착한 목자 수녀회'를 설립하고, 1835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이 수녀회는 윤리적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설립되었다. 성녀 에우프라시아가 33년 동안 이 수녀회를 지도하는 동안 110개의 수녀원으로 발전하였는데, 현재 이 수녀회의 회원 수는 10,000명이 넘는다. 그녀는 1868년 4월 24일 앙제에서 선종하였으며, 1933년 시복되고 1940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가톨릭 홈

 

[영성의 향기]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성 마리 유프라시아 - 착한 목자수녀회 · 관상수녀회 설립



착한 목자는 단 한 마리의 양도 포기하지 않는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잘 먹여줄 뿐 아니라, 딱하고 불쌍한 양일수록 더 큰 사랑과 정성을 쏟아 붓는다. 착한 목자에게 한 마리 양은 온 세상과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양이 온전하건 상처 입었건 관계없이(에제 34,16; 요한 10,11 참조).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성 요한 에우데스의 영성을 따르는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1796-1868)는 1835년 ‘착한 목자 수녀회’와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를 설립했다. 죄 없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 뿐 아니라 한 마리의 양까지 구원하기 위함이다.


유프라시아는 1796년 프랑스의 작은 섬 느와무티에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의사였던 아버지가 가난하고 병든 어린이들을 치료하고 돌봐주는 모습과 자상한 어머니가 늘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는 것을 보며 자랐다. 똑똑하고 활발하고 생기가 넘쳤던 어린 유프라시아는 대머리 노인의 가발을 벗길 정도로 장난이 심하기도 했지만, 매일 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기도를 바친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특히 그녀는 친구들을 동원해 1백 50년이나 방치됐던 지하 성당을 새롭게 단장해 놓는 등 어린 시절에 이미 특출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성장한 뒤 유프라시아는 느와무티에를 떠나 술랑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성 요한 에우데스가 불우한 여성들을 위해 세운 ‘피난처’를 알게 되고 18세 때 ‘애덕 성모 수녀회’에 입회, 요한 에우데스 성인의 영성에 침잠하게 된다. 동료 수녀들은 “늘 친절하고 남을 잘 도와주고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애정을 갖고 대한다”며 그녀를 아주 좋아했고, 그녀는 이례적으로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원장직을 맡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타락한 사마리아 여인과 일곱 마귀가 들린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랑했듯이 유프라시아는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여성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과거를 청산하고 순결하게 살 수 있도록 기도와 속죄 생활을 하는 수녀회를 설립했다. 주위 사람에 따라 한 영혼은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도 될 수 있다고 보았기에, 유프라시아는 그들이 하느님만 신뢰하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한 잔의 우유가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그를 회개로 인도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라고 결코 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우리가 은총에 성실치 못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유프라시아는 수녀들을 온 세계에 파견하고 각 수녀회 분원들이 서로 원활한 교류를 하려면 수녀회에 총장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수녀회를 관할하던 지역 주교들은 그녀가 모든 수녀회를 장악하려는 사욕을 가졌다고 오해함으로써 오랫동안 그녀를 반대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835년 전세계 모든 수녀회에 총장 제도를 도입하라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유프라시아가 세운 수녀회도 자신이 속했던 애덕 성모 수녀회와 구별되는 ‘착한 목자 수녀회’라는 국제연합수녀회로 거듭나게 됐다. 새 수녀회는 유프라시아 생존 당시 이미 1백 10개의 분원을 낼 정도로 발전했다.


“한 영혼은 온 세상보다 더 소중합니다”라는 신조대로 유프라시아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떤 내적, 외적인 상처나 죄악도 인간 영혼의 본질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수녀들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른 소녀들도 결코 단죄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또한 이렇게 죄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관용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녀는 늘 “당신의 마음을 넓히십시오”라고 호소하곤 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유프라시아의 뜨거운 열정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녀회 안에서 ‘영성서원’이라는 제4서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는 31 탄생 2백주년을 맞는 유프라시아는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주님의 일에 전적으로 투신하기를 소망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불우한 처지의 소녀들, 부당하게 상처입고 방황하는 소녀들이 너무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성 마리 유프라시아의 희망 기도


오, 하느님

제 마음의 고동소리가 날 때마다

죄인을 위하여 은총과 용서를 비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제 호흡은 주님께 한없는 자비를 비는 것이오며

제가 보내는 모든 시선이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덕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과 모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 제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평화신문, 1996년 7월 28일, 남기은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착한 목자 수녀회


사진말 - 한국에 진출한 후 마련한 첫 수녀원 모습. 원내는 창립자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


창립과 영성 착한 목자 수녀회는 그 영성의 중심을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두고 있다. 길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다.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나약함을 몸소 짊어지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나약함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감싸 안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한없이 자비로운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사람들을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하도록 하셨는데 수녀회 창립자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는 이러한 연민과 자비로 충만한 착한 목자의 모습과 정신이 회원들이 살아야할 원형이며 본받아야할 참된 모범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면에서 착한 목자 수녀들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스스로 하느님 자비를 끊임없이 체험함으로써 어둠 속에 헤매는 사람들 가운데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현존이 되고자 한다. 마리 유프라시아 성녀는 어떤 상처나 죄악도 인간 영혼의 본질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으며 그녀의 보호 아래 있는 여성들이 회심하고 하느님이 선물하신 그들 고유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회원들의 노력을 독려했다.


착한 목자수녀회 수녀들은 영혼 구원을 위한 삶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정결 청빈 순명 서원 외에 제 4서원인 열성을 서원한다. 이 열성의 주요한 특징은 각 개인 안에 담긴 하느님 모상을 소중히 여기고 각 삶에 대한 하느님 구원 계획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또 이 열성 서원은 영혼 구원을 위한 서원으로 구해야할 영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예언자적 용기를 가지고 자비와 화해를 전달하며 살도록 투신한다는 뜻을 지닌다.수녀회 성소 중심은 이렇게 '열성'이며 그들 정체성의 뿌리 역시 이러한 열성에서 비롯된다. 회원들이 사회 안에서 드러내는 연민 자비 화해 일치 정의의 모습들을 탄생시키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1835년 수녀회를 창립한 마리 유프라시아 성녀는 성령의 영감을 통해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 성부의 뜻과 열성에 대한 사랑을 체험하였고 이를 수녀회에 전해주었는데 이는 1641년 성 요한 에우데스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착취 구조에 허덕이는 여성들 삶을 변화시키고자 창설한 애덕 성모 수녀회 영성을 이어받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 느와무티에 출신으로 18세때 애덕 성모수녀회에 입회한 성녀는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사랑하신 똑같은 사랑과 똑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성 요한 에우데스의 저술들에 심취했고 그같은 메시지는 전 수도생활과 전 생애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다. 예수 성심에 대한 관상 속에서 착한 목자의 애정과 보살핌을 체험하고 착한 목자를 수녀회 모범으로 삼았던 성녀는 예수님 구원 사업을 함께 나누려는 열망을 항상 지니고 있었고 이는 십자가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영혼 구원에 대한 열성을 통해 성취됐다. 그리고 회원들에게도 전해졌다.


성녀는 개인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 모상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하시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있어 미사전례와 영성체는 내적 삶의 원천이었다. 성녀는 회원들이 교회에 대한 사랑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오로지 이러한 방법으로 수녀회가 끊임없이 존속하고 성장하기를 바랬다.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참모습인 착한 목자의 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성녀는 특히 버림받고 길 잃은 양들인 여성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보였다.

[가톨릭신문, 2003년 2월 16일, 이주연 기자]


 

사진말 - 수녀회는 미혼모, 가출소녀 등 상처받은 여성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 춘천 '마리아의 집' 수녀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


사도직 활동 착한 목자 수녀회는 같은 은사(카리스마) 아래 활동과 관상 두가지 생활 양식을 갖는다.


착한 목자 수녀회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관상수녀회는 기도생활로 회원들의 활동을 지지한다. 즉 활동 수녀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응답하여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사랑의 증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착한 목자 관상 수녀들은 고독과 기도생활 속에서 하느님 자비의 보이는 표지로서 그를 증거한다.


회헌 6항 「우리의 화해 사명은 불의와 갈등으로 혼란한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도모하도록 우리를 부른다」는 내용에서 볼 수 있듯 착한 목자 수녀회 은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화해 자비 정의 평화이다.특히 창립자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참모습인 착한 목자로서 버림받고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일하며 그들이 사랑받는 이로 변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포용했듯이 전 회원들은 "한 사람은 온 세상보다 더 소중하다"는 모토 아래 불의한 사회구조로 인해, 또한 자신의 죄와 그 결과로 인해 억압당하고 소외당한 여성들과 소녀들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전한다.

또 그들이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성장시키고 도달할 선택권과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제공한다는 것이 사도직의 기본 방침이다. 이런 카리스마 아래 활동수녀회는 절망속에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고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인도하며 관상수녀회는 죄인들의 회개와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한다.


1835년 수녀회 창립 후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가 선종한 1868년까지 전세계 5개 대륙에 110개 수녀원을 설립했던 수녀회는 2003년 현재 68개 나라에 4300여명 활동 수녀들과 660여명 관상수녀들이 활동중이다.


한국의 착한 목자 수녀회는 1966년 필리핀과 중국에서 사목하던 미국 관구 소속 로스 버지니아 헤이스(노정순) 수녀와 안나 마리 윌리그(서진숙) 수녀가 전주 교구장 한 베드로 주교 요청으로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미군부대 주둔 지역 가난한 소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사도직을 펼쳤으며 1968년 전북 군산 옥봉에 소녀들을 위한 직업학교와 기숙사 개설로 본격적인 활동의 장을 열었다.이후 1973년 서울 수녀원을 건립하고 1976년에는 옥봉 수녀원 철수와 함께 근로 소녀 기숙사 '마리아 자매원'을 서울에 개설, 미혼모 사목을 전개했다.


1979년 강원도 춘천시에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 '마리아의 집'을 건립하는 한편 1995년부터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요청으로 '여성 1366 상담실' 및 '춘천 여성 상담전화'를 운영해 오고 있다.1996년 서울에 가출 청소녀를 위한 착한 목자의 집을 열면서 가출 청소녀 사업에도 적극 참여하기 시작한 수녀회는 1999년 마리아의 집과 연계된 10대 소녀들을 위한 보금자리로 '유프라시아의 집'을 개원했다. 이와함께 지난해부터는 외국인 매매춘 여성을 위한 쉼터로 '벗들의 집'을 개설 운영중이다. 관상수녀회는 1993년 춘천에서 시작됐고 95년 수도원 축성과 함께 양성이 진행중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2월 23일, 이주연 기자]

 

참고자료

■ 남기은 편, 영성의 향기 - 수도회 창립자들의 영성, 서울(성바오로), 1998년, 93-9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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