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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Saint Elizabeth of Portugal)


축 일 : 7월 4일

신 분 : 여왕, 3회원

활동 지역 : 포르투갈(Portugal)

활동 년도 : 1271-1336년

같은 이름 :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이사벨, 이사벨라


성녀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왕 페드로 3세(Pedro III)와 시칠리아(Sicilia)의 왕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17일)을 따라 같은 이름을 지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디니스 1세(Dinis I)와 결혼하여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결혼 7년째 되던 해에 자녀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디니스 1세는 능력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칭찬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의 교육까지 담당하였으며,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병원, 고아원,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양로원 등을 설립하였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냉대와 불신앙을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그리고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하던 아들 아폰소 4세(Afonso IV)와 남편 디니스 1세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아 한때 알랑케(Alenquer)로 추방되기도 했던 그녀는 1324년 남편 디니스 1세가 병을 얻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다. 극진한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회심하였지만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성녀 엘리사벳은 코임브라(Coimbra)의 집으로 은거하였는데, 그곳에는 자신이 세운 성녀 클라라(Clara)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가 있어서 인근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펴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녀는 수녀가 되겠다는 이상을 포기하고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어 엄격한 보속생활과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1336년 7월 4일 에스트레모스(Estremoz)에서 사망하여 코임브라의 수도회 성당에 묻혔다. 성녀 엘리사벳은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복녀로 선언됨으로써 코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이 허락되었으며, 1626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1630년 로마 순교록에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가 7월 8일로 바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두 날을 모두 축일로 인정하면서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기념하도록 하고 있다. 그녀는 흔히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로 알려져 있다. (가톨릭 홈)


 

성녀 엘리사벳


1271년 아라곤의 왕가에서 태어났다. 아직 소녀 시절일 때 포르투갈의 국왕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기도와 자선 사업으로 갖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용감히 견디어 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성 프란치스꼬의 제3회에 입회했다. 자기 아들과 사위 간의 화해를 도모하던 중 1336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가 한 것으로 보는 강론에서(De pace: PL 52,347-348)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해 줍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덕행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보존하는 사람 안에서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평화는 사람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그에게 귀족의 이름을 줍니다. 평화는 또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지니고 있는 위치를 변모시켜 그를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으로, 노예 상태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형제들간의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완성이고 정의의 규범입니다. 지식의 스승이고 윤리의 수호자이며 만사의 칭송할 만한 질서입니다.


평화는 기도의 목표이고 쉽고 안전한 청원 방법이며 모든 욕망의 완전한 성취입니다. 평화는 또 사랑의 어머니, 화목의 유대, 그리고 원하는 것은 다 청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평화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청하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습니다. 우리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 평화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흡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 가운데 너희와 헤어졌다. 내가 다시 올 때 너희가 평화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싶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보고 싶어하신 그 평화를 우리에게 남기고 떠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를 보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준 것은 다시 찾겠다."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모호함이 조금도 없습니다. 마음속 깊이 평화를 심어 주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고 그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것은 원수의 짓입니다. 형제적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미움은 마귀들로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온갖 종류의 미움을 단죄해야 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다 살인자"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평화를 사랑하고 화목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평화와 화목은 사랑을 낳고 또 그것을 자라게 해줍니다. 여러분은 "사랑은 하느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다."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생명에 이바지하는 계명들을 지킵시다. 깊은 평화의 유대로써 형제들의 공동체를 한데 묶고, 허다한 죄를 덮어 주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의 구원적 유대로써 공동체를 견고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 마음의 온갖 욕망을 지닌 채 사랑을 포옹해야 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은혜와 상급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평화 가운데 계시므로 평화를 다른 모든 덕행에 앞서 간직해야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평온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상급이고 여러분에게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평화의 일치 위에 기초를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평온을 누릴 것입니다.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평화의 사도로 알려진 성녀 엘리사벳은 대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혹은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녀는 1271년 스페인의 아라곤 왕 베드로 3세와 시칠리아의 왕녀 콘스탄시아 간에 출생하였다. 부친은 그녀에게, 황후로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헌신한 대고모가 되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을 본받으라고 그와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당시 엘리사벳의 조부는 그의 장자인 베드로와 전쟁 중이었으나 엘리사벳으로 인하여 서로 화평을 맺게 되었다. 또한 조부는 어진 왕녀의 교육을 자진 맡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이때부터 평화 조정자로서 그녀의 일생이 예고되었다고 하겠다.


엘리사벳은 불과 12살에 포르투갈 왕 데니스와 결혼하였는데, 오랫 동안 자녀를 얻지 못하다가 후에 두 남매를 얻었다. 남편은 왕으로서는 능력있고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성실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왕의 사생아들을 친자식처럼 기르고 언제나 친절과 사랑으로 남편을 대하며 동양의 현모양처처럼 끝까지 참고 기다렸다.


아침엔 일찍 일어나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 참례를 한 후 성서를 읽고 맡은 바 집안 일을 하였다. 그 외에도 가난한 자와 환자를 방문하고 위로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궁중의 호화찬란한 생활을 피하고 매일 빵 세 조각과 물로써 연명할 만큼 극기의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감탄할 만한 극기와 애덕의 생활이 하느님의 뜻에 의합하였던지 그녀를 통하여 가끔 기적이 일어났다. 즉 눈먼 아이의 눈에 손을 대자 눈이 밝아졌는가 하면 환자에게 십자성호를 그었을 때 즉시 완쾌되는 일도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왕이 사생아들을 더 좋아한다고 반란을 일으킨 왕자 알퐁소와 왕과의 부자간 싸움을 전투부대 사이를 가로질러 두 차례나 화해시켰으나 왕후가 아들을 사촉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모함에 따라 잠시 동안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복수해야 된다는 신하들을 설득시켜 왕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하였다.엘리사벳은 아라곤 왕인 페르디난도와 왕위를 주장하는 그의 사촌 야고보와의 싸움에 있어서도 중재인의 역할을 하였다. 양군이 대진하여 막 전쟁이 벌어지려 할 때에 왕비가 홀로 뛰어나가 양편을 조정시키고 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였다.


1325년 장부인 데니스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왕후의 극진한 간호를 받다가 선종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 알퐁소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모든 것을 버리고 프란치스꼬 제3회의 옷을 입고 그녀가 세운 코임브라에 있는 글라라회 근처에 방을 얻어 수도 생활을 시작, 그녀의 삶은 수도자의 모범이 되었다.


1336년 그녀의 아들 알퐁소 왕과 사위인 케스틸 왕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그녀는 건강이 나쁨에도 불구하고 무더위를 무릅쓰고 에스트레모스로 달려가 양자간의 화해를 이루었으나 과로와 열병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병고를 잘 참았고 조금도 그 아픔을 내색하질 않았다. 어느 날 머리맡에서 간호하던 자부를 보고 “미안하지만 거기 오시는 부인에게 자리를 좀 양보해 줄 수 없겠니?” 하고 말하였다. 자부는 “아무도 안 계신데 누구신데요” 하고 물으니 “바로 거기 계시지 않니, 흰 옷을 입으신 분이…”라고 대답하였다. 바로 그분이 그녀를 영접하러 오신 성모님이셨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성총의 모친, 자애하신 모친이신 성 마리아여! 원수의 손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임종 때에 나를 구하소서!” 하고 기도하며 1336년 7월 4일 65세로 에스트레모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전쟁의 비참함과 파괴를 막기 위해 바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유해는 코임브라에 있는 글라라 수녀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1625년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그녀를 시성하고 그녀를 위해 성무일도와 찬미가도 지었다. 축일은 처음엔 7월 8일이었으나 그녀가 저 세상에 태어난 날인 7월 4일로 옮겨졌다.


성녀의 탄생은 평화를 가져왔고 성녀의 사업도 평화였으며 또 평화를 위하여 생명을 바쳤다. 부부간의 평화, 부자간의 평화, 친척간의 평화, 국가간의 평화를 위한 그녀의 기구와 희생과 노력은 많은 불행과 재난을 방지하였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리니”(마태 5,9). 분열된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놀라운 은총을 받은 성녀 엘리사벳의 전구로 우리도 남북이 분열되고 동서가 불목하는 이 땅에 화해와 평화를 심는 역군이 될 수 있도록 특별한 노력과 기도와 희생을 바쳐야겠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70-172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서울(성바오로), 2002년, 164-166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엘리사벳, 포르투갈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065-60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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