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칼라브리아

12/03/2016

 

성 요한 칼라브리아(Saint John Calabria)

 

 

축         일  :    12월 04일

신         분  :    신부, 설립자

활동 지역  :    이태리(Italy)

활동 년도  :    1873-1954년

같은 이름  :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1873년 10월 8일 이탈리아의 베로나(Verona)에서 구두 수선을 하는 아버지와 귀족 집안의 하녀로 일하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성 요한 칼라브리아(Joannes Calabria)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 형편이 나빠져 초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 요한 칼라브리아의 신심과 자질을 눈여겨 본 교장신부의 지원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신학교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었던 그는 버려진 아이들과 고아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임을 깨닫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천주 섭리의 가난한 종 수도회를 설립하여 이탈리아 전역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일련의 가정운동을 시작하였다. 일생 동안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며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 그는 1954년 12월 4일 산 제노(San Zeno)에서 선종하였고, 1988년 4월 1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99년 4월 18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홈

[금주의 성인]

성 요한 칼라브리아(St. John Calabria, 12월 4일)

 

 

버려진 아이와 고아들에게 사랑을, 천주 섭리의 가난한 종 수도회 설립

1873~1954. 이탈리아 베로나 출생. 사제. 천주 섭리의 가난한 종 수도회 설립.

 

성인은 구두 수선일을 하는 아버지와 귀족 집안 하녀로 일하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 사정이 급격히 나빠져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또래들보다 학업성적이 뛰어나고 신앙심이 깊은 성인을 눈여겨 본 교장신부는 성인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줬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사제가 될 재목임을 알아보고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이끌어줬습니다. 성인 역시 그같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성인은 어렸을 때부터 구걸하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굶을지언정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건네는 등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눠줬습니다.

 

그는 신학교 1학년 때 자신의 집 앞에서 울고 있는 고아를 집에 데려와 먹여주고 입혀주면서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평생 버려진 아이들과 고아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베풀겠다고 다짐합니다.

 

성인은 이후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천주 섭리의 가난한 종 수도회'를 설립해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이 수도 공동체는 즉시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대됐고 인도에도 분원이 생겼습니다.성인은 또 자신이 돌보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알려주며 성소를 식별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아 많은 이들이 신학교에 입학하거나 수도회에 입회했습니다.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준 성인은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평화신문, 2010년 11월 28일, 박수정 기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조반니 칼라브리아 - 크리스천 일치 운동의 선구자

 

조반니 칼라브리아(Giovanni Calabria, 1873-1954)는 이탈리아의 베로나(Verona)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다. 그가 12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심부름하는 소년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반니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수도자 성소를 받은 것을 자각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만을 먹으면서 극기(克己)하였다.

 

조반니는 신학교에 재학 중 군대에 소집되어 2년 동안 베로나에 있는 군인병원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당시, 발진 티푸스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병으로 고통을 받게 되자 조반니는 자진하여 그들을 간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러한 환자들을 돌보는 활동으로 자신도 발진 티푸스에 걸려 한동안 고통을 받았다.

 

조반니는 군 복무를 마친 다음, 다시 신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모두 마치고 1901년 8월 11일, 베로나 교구 바칠리에리(Bacilieri) 추기경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본당 사제로 임명을 받고 임지로 가서 사목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인과 굴뚝 청소부를 돕기 위한 자선사업을 시작하였다. 1907년 11월 26일, 조반니는 고아와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소년들을 위한 집인 ‘카사 부오니 판치올리’(Casa Buoni Fanciulli, 착한 어린이집)를 지었다. 그는 많은 소년들을 가르쳤고 그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훈련시켰다. 한편, 그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기관을 세워 어르신과 병자를 위한 활동도 펼쳐나갔다. 조반니의 이러한 활동에 공감하여 그와 함께 이 사업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이를 돕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자 그는 거룩한 섭리의 가난한 종(the Poor Servants of Divine Providence, P.S.D.P)이라는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도회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가장 비참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봉헌되었다. 이 수도회와 같은 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할 젊은 여성들을 모아 거룩한 섭리의 가난한 여종(the Poor Women Servants of Divine Providence)이라는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조반니는 베로나 시민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갈 때, 보다 더 크리스천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외부 형제 가족’(the Family of External Brothers)이라는 평신도 단체를 결성하였다.

 

<사진> 필리핀의 천주 섭리의 가난한 종 회원들

 

조반니는 크리스천 일치 운동의 선구자로서 이를 위해 수많은 활동을 열성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많은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조반니는 죽을 때까지 쉴 새 없이 일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은 베로나에 있는 수도원 모원에 안치되었다. 1986년, 조반니는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88년 4월 17일, 베로나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와 주세페 나심베니(Giuseppe Nascimbeni)를 시복하였다. 1999년 4월 1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조반니 칼라브리아를 성인으로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반니 칼라브리아는 열렬한 신심을 지닌 분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선사업에 투신하였습니다. 그분의 희생정신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 뜨거운 사랑 그리고 교회에 대한 충성은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됩니다.”

 

성 조반니 칼라브리아의 축일은 12월 4일이다.

[교회와 역사, 2012년 4월호, 번역 송영웅 바오로(봉명학원 재단이사)]

John Calabria (1873-1954)

 

priest, Founder of the Congregation of the Poor Servants and

the Poor Women Servants of Divine Providence

 

 

JOHN CALABRIA was born on October 8th, 1873 in Verona. He was the seventh and last child of Luigi, a cobbler and of Angela Foschio, a maid-servant to the high-class people and a woman of great faith, educated by the Servant of God Fr. Nicola Mazza in his Institute for poor children.

 

Poverty was his mistress right from his birth. After his father's death he had to interrupt his 4th year of the Elementary School to find a job. The Rector of San Lorenzo, Fr. Pietro Scapini, noticing the virtues of this boy, prepared him privately for the admission examination into the Lyceum at the Seminary. Having passed his exams, he was admitted to and frequented the Lyceum as an extern. His studies were once again interrupted by a two-year military service.

 

Charity was his lifelong characteristic

 

it is in this field that he distinguished himself mostly. In fact he served all, offering himself to do the most humiliating and courageous tasks. He won the heart of his fellow soldiers and of his superiors, and helped many to come back to the Church, and to practise faith.

 

Having terminated his military service, he resumed his studies. One very special cold night of November 1897 - he frequented the 1st year of theology - returning home from a visit to the sick in hospital, he found a boy croaching on the doorstep of his house; he had ran away from the gypsies. Fr Calabria picked him up, took him in, kept him in his house and shared his room with him. It was the beginning of his works in favour of the orphaned and the abandoned boys.

 

A few months later he founded the "Charitable Institution for the assistance to poor sick people." These were only the beginnings of a life characterised by charity. "Every instant of his life was a personification of St. Paul's marvellous canticle on charity," wrote a Hebrew woman-doctor in her Lettera Postulatoria to Paul VI about Fr. Calabria. She had been in hiding from the nazi-fascist persecution, dressed in a nun's habit in one of his religious Institutes.

 

Priest and Founder of two Congregations

 

 

After being ordained priest on August 11th, he was appointed confessor of the seminary and curate of St. Stephen's Church. He devoted himself with particular zeal to hearing confessions, and to charitable works, helping in particular the poorest and the outcasts.

 

In 1907 he was appointed Rector of St Benedetto del Monte. He also welcomed soldiers in his house and cared for their spiritual welfare. On November 26th, 1907 he founded the "Casa Buoni Fanciulli." The following year it moved definitely to Via San Zeno in Monte. Today, their Mother House.

 

Besides the boys, the Lord also sent him lay people, wishing to share with him the offering of their own life to the Lord. With this handful of men totally given to God in the service of the poor, with a life rooted in the Gospel, he revived the apostolic spirit of the Church in Verona. This nucleus of men was the foundation of the "Congregation of the poor servants of Divine Providence" which was approved by the Bishop of Verona on the 11th February 1932 and obtained Pontifical approval on the 25th April 1949.

 

Immediately after the Diocesan approval, the Congregation spread out to various parts of Italy - serving the poor, the abandoned and the outcasts. It also extended its works to the elderly and to the sick, reviving them in the "Cittadella della Carita." The apostolic heart of Fr. Calabria went to the faraway Paria in India when he sent four of his Brothers to Vijayavada.

 

In 1910 he also founded the female branch "Le Sorelle" which later became the Congregation by Diocesan Right on the 25th March 1952 bearing the name of Poor women servants of Divine Providence and on the 25th December 1981 it obtained the Pontifical approval.

 

A prophet of the fatherness of God and search for his kingdom

 

To the two Congregations Fr. Calabria entrusted the same mission the Lord had inspired him with since his early priesthood: "To prove to the world that Divine Providence exists, that God is not a stranger, but that He is a Father, He thinks of us, on condition that we think of Him and do our part which is that of seeking first and foremo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justice." (Cfr. Matth. 6, 25-34).

 

To witness all of this, he welcomed gratuitously in his Institutes boys in need, both materially and morally. He founded hospitals and Institutes to help the sick and the old people. He welcomed in his houses for formation both youth and adults poor, to help them realize their priestly or religious vocation. He helped them gratuitously until they reached the theological year of their studies or made their definite choice to embrace religious life. They were free to choose the Diocese or Congregation as the Lord inspired them. He established that his priests exercised their apostolate in poor areas "where their is nothing humanly promising."

 

He shone like a lighthouse in the Church of God

 

These are the exact words that Blessed Cardinal Schuster had had engraved on his tomb. Infact from 1939-40 until his death, contrary to his inborn desire to remain unnoticed, he extended his horizons to the Church frontiers "proclaiming" to all that the world can only be saved by returning to Christ and to his Gospel.

 

It was in this way that he became a prophetic voice, a point of reference. Bishops, priests, religious and the laity, found in him the sure guide for themselves and for their initiatives.

 

In this context, the Bishops of the Episcopal Conference of Triveneto, in their Lettera Postulatoria to Pope John Paul II could write: "Fr Calabria, to prepare the Church of the year 2000 - a familiar expression of his, - made his life a suffering and grief-stricken appeal for conversion, renewal, at Jesus' hour, with impressive accents and insistent urgency... It seems to us that Fr. Calabria's life and his person itself constitute a "prophecy" of your passionate appeal to the whole world: "Aperite portas Christo Redemptori! ".

 

He understood this radical and prophetic spiritual renewal in which even the laity could be involved. As a matter of fact in 1944 he founded "The Family of External Brothers" solely made up of laymen.

 

He prayed, wrote, acted and suffered for the unity of Christians. In view of this he kept in touch with, protestants, orthodox and Hebrews: he wrote, spoke and loved but he never entered into discussions.

 

He conquered everybody's love. Even the Lutheran Pastor, Sune Wiman of Esklstuna (Switzerland), who had had several epistolary sharings with him, on the 6th of March 1964 in a Lettera Postulatoria to the Holy Father Pope Paul VI, asked that his venerable friend be glorified.

 

And this was also the most mysteriously and sorrowful period of his life. It seemed that Christ had associated him to his agony in Gethsemane and on Calvary, accepting the offering of his life as a "victim" for the sanctification of the Church and the salvation of the world. Blessed Cardinal Schuster compared him to the Servant of Jahve. He died on December 4th, 1954. On the eve of his death he made his last act of charity offering his life to God for the dying Pope Pius XII. The Lord accepted this offer, for while he was dying, the Pope mysteriously and unexpectedly recovered and lived for another four years.

 

The same Pontiff, unaware of the last charitable gesture of Fr. Calabria but knowing Fr. Calabria very well, when he heard of his death, sent a telegram of condolences to the Congregation in which he defined him "campione di evangelica carità."

 

Fr. Calabria was beatified by Pope John Paul II on the 17th April 1988.

 

[출처 : http://www.vatican.va/news_services/liturgy/saints/ns_lit_doc_19990418_giovanni-calabria_en.html]

 

Zero e Miseria - The life St. John Calabria and the Poor Servants of Divine Providence

참고자료

■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 조반니 칼라브리아’,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495-4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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