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Posts/최근글
Archive/자료
Recent Posts/지난글
Follow Us
  • Facebook Basic Square
  • Twitter Basic Square
  • Google+ Basic Square
RSS Feed

성녀 우르술라(Saint Ursula)

성녀 우르술라(Saint Ursula)

축 일 : 10월 20일

신 분 : 동정 순교자

활동 지역 : 쾰른(Koln)

활동 년도 : +연대미상

같은 이름 : 오르솔라, 우루술라, 우술라



성녀 우르술라는 4세기경 독일 쾰른(Koln)에서 11,000명의 소녀들과 함께 순교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들의 순교에 얽힌 이야기들은 중세기 때 “황금 전설”(Golden Legend)에 수록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우르술라는 영국에서 그리스도교 신자인 어느 왕의 딸로 태어났다. 우르술라는 이교도 왕의 아들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결혼을 하지 않고 동정녀로 살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3년이란 말미를 얻어서 귀족 가문의 처녀 10명과 함께 여행길에 나셨다.


우르술라와 10명의 처녀들은 각각 1,000명의 처녀들을 데리고 황해를 떠나 바다 건너 유럽 대륙의 쾰른에 도착하였으며, 그 다음에 육로로 로마(Roma)까지 갔다. 그들은 다시 쾰른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훈족의 족장이 우르술라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부당했다. 그러자 화가 난 족장이 우르술라와 그 일행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며 고문을 하였고, 우르술라의 지도를 받은 그들은 배교하지 않고 모두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1,000이란 숫자는 'XIMV'을 후대에 필사자가 잘못 읽은 데서 기인한다. 본래 이 표기는 '11명의 동정 순교자'(11 Martyres Virgines)라는 의미인데, 이를 '11,000명의 동정녀'(11 Milla Virgines)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1535년 성녀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1월 27일)는 우르술라 성녀의 이름을 딴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우르술라는 오르솔라(Orsola)로도 불린다.


가톨릭 홈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61. 성녀 우르술라 II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한 순례

고종희(한양여대 교수 · http://blog.naver.com/bella4040)


- 한스 멤링, 쾰른에 도착한 우르술라 일행, 1489, 캔버스에 유채, 37.5×25.5 cm, 브뤼게, 한스 멤링 미술관.



3년간 로마 순례 떠난 우르술라와 처녀들

쾰른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는 모습 그려

멀리 보이는 대성당 앞 주택 창문의 천사

성녀가 순례 후 쾰른에서 순교할 것 예고


성녀 우르술라에 관한 이야기는 400년 경 쾰른에서 발견된 한 돌에 새겨진 기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록은 클레마티우스라는 사람이 쾰른에서 그 지역의 몇몇 처녀들에게 봉헌된 교회를 복원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처녀들의 이름이나 연대 등에 대한 언급은 없으니 이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는 셈이다.


이후 9세기 경부터 이들이 영국 출신으로 쾰른에 왔으며 막시미아누스 시절 박해를 받은 자들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이들 순교자들이 11,000명으로 불어나게 된 것은 10세기에 이르러서이다. ‘XI MV’를 ‘11명의 동정 순교자’로 번역해야 하는데 ‘11,000명의 동정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즉 M을 순교(Martyres)의 약자가 아니라 1천(Milla)의 약자로 번역한 데서 온 오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천 명의 처녀 순교자이야기는 전설로 굳혀졌으며, 13세기 말에 쓰여진 〈황금전설〉에서 흥미 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황금전설이 전하는 우르술라 이야기는 이 성녀에 관한 이야기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국의 브레타냐에 마우로라 불리는 그리스도교를 열심히 믿는 왕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름다움, 지혜, 정직함에서 무엇 하나 빠지는게 없는 우르술라라는 딸이 있었다. 잉글랜드는 브레타냐보다 더 강한 나라였는데 이 나라의 왕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로서 자신의 아들을 우르술라와 혼인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대사를 통해 온갖 보석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면서 자녀들끼리 혼사를 맺을 뜻을 밝혔다. 그는 이 혼인이 성사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위협도 가했다.


브레타냐의 왕은 딸을 비신자의 아들과 혼인시킨다는 것이 영 맘에 내키지 않았으나 그리할 경우 닥쳐올 위협도 걱정되었다. 우르술라는 부친에게 결혼을 승낙하되 그녀가 3년 동안의 말미를 얻어 열 명의 처녀들과 로마에 가서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다는 조건을 내걸으라 하였다. 하지만 황금전설에서는 이들 열 명의 처녀들이 각각 천 명의 처녀들을 데리고 가서 모두 11,000명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사이 남편감은 교리 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우르술라는 약혼자가 세례를 받지 않으면 결혼이 성사되지 않아도 되니 손해 볼 일이 없었고, 만일 세례를 받는다면 동행한 처녀들과 함께 자신을 하느님께 바칠 결심이 서 있었다. 왕자는 이 조건을 기꺼이 수락했으며, 스스로 세례를 받았고, 부친에게 우르술라의 청을 들어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브레타냐에 로마로 순례여행을 떠날 수많은 처녀들이 모여들었다. 배를 탄 이들을 바람은 쾰른으로 인도했다. 쾰른에서 밤에 주님의 천사가 우르술라에게 나타나서는 로마에 다녀 온 후 다시 쾰른에 들러 순교하게 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들 일행은 바젤을 거쳐 목적지인 로마로 향했다. 로마에 도착하자 브레타냐 출신의 교황 치리아쿠스가 마중을 나왔으며 교황은 세례 받지 않은 처녀들에게 모두 세례를 주고 자신도 이후 이들 처녀들과 함께 쾰른에 간 후 거기서 순교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전설이기 때문에 이들 이야기가 과연 신빙성이 있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뿐이다.


지난주에 소개한 한스 멤링의 〈성녀 우르술라의 성체함〉에는 황금전설에 근거한 성녀의 이야기를 모두 6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그려놓았다. 이 그림은 우르술라 일행이 배로 쾰른에 도착한 후 배에서 내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도시의 성문이 보이며 그 너머로 유명한 쾰른 대성당이 보인다. 성당 바로 앞의 한 주택 창문에 천사가 우르술라에게 나타나 쾰른에 돌아와 순교할 것을 예고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30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m/memling/4ursula/36ursu01.jpg)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62성녀 우르술라 III


하느님께 약속한 동정서원을 지키다

고종희(한양여대 교수, http://blog.naver.com/bella4040)


- 한스 멤링, <성녀 우르술라의 순교>(성녀 우르술라 유골함의 부분), 37.5 x 25.5 cm, 나무 패널에 유화, 브뤼게, 한스 멤링 미술관.


쾰른 장악한 야만족 처녀들 무참히 살해

생존 성녀 훈족 왕자 청혼 거절하고 순교

작품속 왕자 우르술라 향해 활 시위 당겨

인물 · 풍경 · 건축물 · 복식 등 사실적 묘사


성녀 우르술라가 이끄는 1만 1000명의 처녀들은 로마에서 교황 치리아쿠스를 만났다. 교황은 주님의 천사로부터 이들과 함께 순교하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는 일행 중 세례 받지 않은 모든 이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교황청을 아메토라는 사람에게 맡기고 처녀들의 순례길에 합류하여 독일 쾰른으로 향했다. 교황청을 비웠기 때문에 치리아쿠스는 이후 교황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한편 1만 1000명의 처녀들이 쾰른에 도착하니 도시는 당시 야만족인 훈족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이 무렵 로마제국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제국의 방위선이 곳곳에서 뚫리는 상황이었다. 이들 훈족은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상을 저지르는 포악한 종족이었는데 1만 1000명의 처녀 일행을 보고는 마치 늑대가 양을 잡아먹듯이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우르술라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는데, 아름다운 우르술라를 본 훈족의 왕자는 그녀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하자 화살을 쏘아 성녀의 목숨마저 앗아갔다. 마침내 우르술라는 하느님께 약속한 동정서원을 지키고 순교한 것이다.


성녀 우르술라에 얽힌 이 일화는 1만 1000명이나 되는 처녀들이 영국에서 출발하여 독일의 쾰른과 스위스의 바젤을 거쳐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갔다가 다시 쾰른에 와서 순교했다는 어찌 보면 황당한 이야기로 보이는데 ‘황금전설’은 당대의 교황이나 왕, 추기경, 주교의 이름까지 명시하며 기술하고 있다. 우르술라의 이 이야기는 이 성녀에 관한 이야기의 원전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벨기에 브뤼게의 한스 멤링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멤링의 대표작 성녀 우르술라의 유골함에는 이상 소개한 성녀의 이야기가 마치 그림으로 읽어 나가듯이 여섯 장면에 나누어 그려져 있다. 한쪽 면에는 “쾰른에 도착”, “바젤에 도착”, “로마에 도착”이 그려져 있고 그 반대쪽은 “바젤에서 출발”, “쾰른에서 순교당하는 처녀들”, “훈족에게 순교당하는 성녀 우르술라”로 끝을 맺고 있다.


이들 그림의 배경에는 각 도시의 특색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풍경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수많은 처녀들을 그려놓아서 마치 단체 여행을 연상시키며, 이국적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을 수송한 배는 대단히 정확하게 재현되었고, 배경의 건축물 역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처녀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당대 여인들의 복식을 재현한 것이어서 당시 화가의 관심사가 풍경, 사물, 인물의 관찰에 바탕을 둔 사실의 재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울러 유골함에 그려진 이들 그림은 성녀 우르술라의 여행이라는 주제를 통해 실제로 당대인들 사이에서 순례 여행이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작품은 독일 쾰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훈족의 왕자가 우르술라에게 화살을 쏘고 있고 성녀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배경에 그려진 고딕 양식의 쾰른 대성당은 3세기 혹은 5세기에 생존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녀 우르술라 시대에는 존재 하지 않았던 고딕 건축물이다. 반면 인물 바로 뒤에는 훈족의 막사를 그려 놓았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이며, 성녀의 순교를 지켜보는 하얀 개, 궁사들의 포즈 등이 장면의 리얼함을 살리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1년 2월 13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m/memling/4ursula/36ursu06.jpg)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60. 성녀 우르술라 I


지붕 · 벽면 모두 성녀 일화 그린 성체함 북유럽 르네상스 발상지의 대표 화가 한스 멤링 작품

고종희(한양여대 교수 · http://blog.naver.com/bella4040)


- 한스 멤링, 〈성녀 우르술라의 성체함〉, 1489, 오크나무, 91.5×99×41.5 cm, 브뤼게, 한스 멤링 미술관.


지난해 가을 벨기에의 브뤼게를 방문한 첫 인상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북유럽 특유의 뾰족한 지붕의 주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시가지는 정결하고, 운치가 있었다.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아름다운 거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옮겨놓은 듯도 하였으나 해가 없는 흐린 날씨는 북유럽 특유의 냉정함을 풍겼다.


브뤼게는 플랑드르 지역의 대표도시 중 하나로 미술사에서는 특별히 북유럽 르네상스의 발상지로서 중요하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15세기 초 피렌체에서 탄생했다면 북유럽 르네상스는 브뤼게를 비롯한 동시대 플랑드르 지역에서 탄생했다.


문명의 탄생지라 함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뜻한다. 브뤼게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에 상상을 초월하는 대형 성당들이 몇 백미터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 것만 보아도 한때 이 도시가 얼마나 융성했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대규모 성당들이 세워졌다는 것은 성당을 세울 자금이 충분했다는 뜻이고, 이는 결국 시민들과 후원자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음을 의미한다. 당시 유럽의 부유한 상인들과 귀족들이 가장 중요시 여긴 일이 성당을 세우고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주문하여 좋은 작품을 성당이나 시청사 등에 봉헌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뤼게는 각 나라의 상인들이 이곳에 집결하여 무역을 한 상업의 중심지였다. 오늘날의 뉴욕과 흡사했을 것이다. 무역을 통한 상업의 교류는 미술 교류로 이어진다. 당시 플랑드르에서 꽃핀 특유의 정교함을 바탕으로 한 플랑드르 회화가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 것도 이곳 작가들의 작품들이 타 국가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 사이에서는 플랑드르 작가의 그림을 컬렉션 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고, 물품을 가득 실은 배 안에는 미술품도 상당수 있었으며, 자연적으로 화가들은 선진 회화라 할 수 있는 플랑드르 화풍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보티첼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브뤼게에 한스 멤링(1435/40~1494) 미술관이 있다. 멤링은 얀반 에이크와 반 데르 바이덴의 계보를 이은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다. 원래 이 미술관은 1150년에 세워진 성 요한 병원으로 19세기 초 의대 건물로 쓰이기 전까지 이 도시의 병원이었고, 1990년에 한스 멤링 시립 미술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병원 건물이 멤링 미술관으로 변신하게 된 이유는 이곳에 멤링의 대표작 ‘성녀 우르술라의 성체함’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멤링은 종교 단체의 주문을 받고 성 요한 병원을 위해 ‘성녀 우르술라의 성체함’을 제작했고, 1489년, 성녀의 축일인 10월 21일 성녀 우르술라의 유골이 멤링이 새로 제작한 성체함으로 옮겨졌다. 이 중요한 행사에 성체함 제작자인 화가 멤링도 있었다.


성체함의 모양은 지붕,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고딕 양식의 교회 모양을 하고 있다. 벽 부분은 모두 그림으로 채워졌는데 앞·뒤 면에는 성 모자상과 성녀 우르술라가 그려져 있고, 벽 부분에는 성녀 우르술라의 일화들이 6개의 장면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성체함에 그려진 성녀 우르술라의 생애는 ‘황금전설’에서 따온 것으로 성녀가 수많은 처녀들과 함께 로마를 순례한 후 독일 쾰른에서 순교하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는데 멤링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이 성녀의 일화를 다룬 그림으로는 가장 유명하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16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m/memling/4ursula/36ursu.jpg)

참고자료


■ 고종희 저, 명화로 읽는 성인전(알고 싶고 닮고 싶은 가톨릭성인 63인) - '우르술라', 서울(한길사), 2014년, 298-307쪽.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녀 우르술라 동정과 동료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292-2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