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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포로소의 성 프란치스코

캄포로소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Campososso)

축 일 : 9월 19일

신 분 : 증거자, 수사

활동 지역 : 캄포로소(Camporosso)

활동 년도 : 1804-1866년

같은 이름 :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Liguria) 해안의 소도시인 캄포로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그는 콘벤투알 수도자 한 분을 우연히 만나 자신의 성소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스트리 포빈테 수도원에 갔으나 3회원으로 받아 들여졌을 뿐이었다. 더욱 엄격한 생활을 원하던 그는 즉시 이곳을 떠나 카푸친회에 들어갔고, 여기서 프란치스코란 이름으로 서원하였다.


평수사인 그는 주로 병자를 돌보는 일을 하다가 원장의 지시를 받고 탁발을 시작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고통이 뒤따랐다. 어떤 때에는 빵 대신 돌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10년 동안이나 겸손하게 탁발한 결과 그는 뛰어난 성덕을 닦을 수 있었다. 그는 ‘파드레 상토’(Padre Sancto), 즉 성인 신부로 통할만큼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덕을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866년 제노바(Genova) 지방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기 자신도 희생자가 되어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1929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1962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홈

 

포로소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Francis Mary of Camporosso, 1804-1866)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전염병, 가장 유명한 희생자를 내다!


1866년 8월, 전염병 콜레라가 이탈리아 북서부의 항구 도시 제노바(Genova)를 휩쓸고 있었다. 그 달 말까지 사망했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는 피해자가 수백 명에 달했으나, 이에 시 당국의 대책들은 하나같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


카푸친 관할인 어느 한 요양소, 그곳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은 제노바시의 가장 사랑받는 어느 인물의 자원봉사 지원을 거절했다. 그가 환자들을 돌보기에 몸이 너무 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퇴박맞았다고 해서 쉽게 낙심할 그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예전부터 익히 알아온 다세대주택들이 즐비한 빈민가의 골목으로 길을 나섰다.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병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인원의 사망자는 끊임없이 속출하고 있었다.


결국 9월 중반, 고요한 수도원 독방, 이 유명한 노인은 주님께 기도를 올렸다. 제노바의 시민들에게 닥친 이 끔찍한 재앙을 그치게 해달라고, 또한 그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여생을 희생 제물로 바치겠노라고..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 기도 후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얼굴과 손은 열을 내며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에게 콜레라 초기 증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제야 도시 전역에 창궐했던 콜레라가 사그라질 수 있었다. 이 지독한 전염병이 사라진 뒤에, 제노바의 시민들은 그들이 ‘거룩한 신부’라고 불렀던 그 도시의 가장 유명한 거주자, 캄포로소(Camporosso)의 프란치스코 마리아의 창백한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스승님의 신성한 말씀대로 극진히 살아온 카푸친 형제였다.



신심 깊은 시골 사나이


이 형제의 명성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62여 년 전, 그의 출생으로 돌아가야 한다. 훗날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가 될 ‘요한 복음사가 크로에세(Croese)’는 1804년 12월 27일, 이탈리아 리비에라 서해안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캄포로소(Camporosso)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장 일꾼 ‘안셀모 크로에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 안토니아 가쪼(Gazzo)’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자녀 중 넷째였다. 잠시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학생이었던 그는 결국 7살의 나이에 작은 암소 한 마리를 목장에 끌고 나가 가족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작은 텃밭에서도 일하며, 올리브와 포도, 각종 채소들을 수확했다.


성모 신심은 크로에세 가족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살 되던 해 요한은 중병이 들었다. 가족은 그를 니이스(Nice) 근처에 있는 ‘호수의 성모 성지’에 데려 갔고, 그 이후 요한은 건강을 회복했다. 때문에 그 성지순례는 요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때부터 요한은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방문하기 시작했고, 그곳의 요한 수사를 알게 되었다.



우여곡절 후 제 성소 찾기


서서히 발전된 그의 성소는 결국 1822년 10월 22일, 세스트리 포넨테(Sestri Ponente)에 있는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으로 삼회 봉헌자가 되게 했다. 하지만 수도원 생활은 예전 집안 생활보다 더 편했고, 절대적인 가난과 보다 깊은 묵상기도를 그리워 한 신입회원은 그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으나, 장상들로부터 이동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다. 결국 예전부터 알고 있던 카푸친 형제인 ‘제노바의 알렉살델 형제’의 도움을 받아 어느 늦가을 아침, 세스트리 포넨테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도망쳐 나왔다. 그리하여 그는 산 프란체스코 디 볼티(San Francesco di Volti)의 카푸친 은둔소에서 청원자로 받아들여졌고, ‘프란치스코 마리아’라는 수도명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근 3년간의 긴 청원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애덕의 정신이 뛰어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기 위해 스스로 남은 음식만 먹곤 했는데,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정신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익숙해져 온 선행하는 덕성으로부터 우러난 것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멘토네(Mentone)시에 소기업을 세우러 갔을 때, 함께 동행 한 요한은 누더기를 걸친 어느 동갑내기 아이에게 자기 새 옷을 내주었다. 요한은 화가 난 아버지에게 뺨을 얻어맞았지만, 다른 뺨을 돌림으로써 아버지의 질책에 대응했고, 결국은 아버지에게서 감탄과 포옹을 얻어냈다.


볼트리에서의 그 긴 청원기는 실제로 부족했던 세스트리의 경험을 보완했다. 1825년 말, 관구대리였던 치프레사(Cipressa)의 안토니오 형제의 허락으로 프란치스코 마리아는 은둔소를 떠나 제노바에 있는 성 바르나바의 은둔소 및 수련원에 갔다. 그 해 12월 17일, 그는 그곳에서 수도복을 입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그의 수련장 폰테데치모(Pontedecimo)의 베르나르도 형제는 그 젊은 수련자의 열정을 식혀야 했지만, 그의 수련 동기 형제들은 그에게서 착함과 따뜻한 우정을 느꼈다. 그는 평형제가 되기를 원했는데, 성 프란치치스코의 모범에 따라 ‘겸손하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더 나은 편’이기 때문이었다고 나중에 그 이유를 털어놓았다. 후일 사람들은 그를 ‘거룩한 신부(Padre Santo)’라고 불렀는데, 그는 자신의 이런 호칭을 소리 높여 거부했다.



제노바가 절실히 구한 그 구걸자


1년 후, 1826년 12월 17일에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는 제노바의 사무엘 형제의 손 안에서 종신서약을 했다. 22살 채 되지 않은 그였지만 그의 영적인 성숙함을 보고 봉사자(장상)들은 그를 관구의 모원인 제노바의 무염시태 형제회의 회원으로 임명했다. 남은 일생 동안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의 살 곳이 된 이 집은 수도회의 여러 가지 사도직의 중추요 제노바 시의 다양한 활동의 중심지였다. 무염시태의 형제회는 카푸친 형제회의 일반적 사목활동 외에 관구의 행정을 다루는 관구청과 관구의 요양원, 형제들의 수도복을 만드는 모직공장, 시민들의 보건 역할을 하는 약국, 공공 저울과 장작(땔감) 물류관리소 등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곳에 새롭게 도착한 다른 젊은 평형제들과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 또한 그곳에서 간호와 요리와 원예와 제의실담당 등 여러 소임을 익혔고 그것을 실행했다. 시성운동 자료에 의하면 5년에 걸친 이 수습과정 동안 그는 ‘언제나 부지런하고 고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끝낸 후, 1831년 그는, 더 이상 혼자서 일을 못 하게 된 나이가 든 시골 동냥자 폰테데치모의 비오 형제의 동반자로 임명 받았다. 이로서 프란치스코 마리아를 관구의 가장 유명한 동냥자가 되게 할 이 봉사의 사명이 조금씩 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2년간 비사뇨(Bisagno)의 작은 산골을 두루 다니며 농장 일꾼들과 그들의 집을 방문했다. 이 수습 기간은 그에게 있어 매우 소중했는데, 동냥자로서의 특별한 생활양식에 걸맞은 믿음과 인내심, 애덕과 겸손 그리고 신앙으로 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에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골 동냥이 낸 두드러진 결과는,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가 시내 동냥을 맡을 수 있도록 수호자를 설득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벌써부터 그의 거룩함을 직관했고, 점점 그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리를 거니는 그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매일 이른 아침, 여러 미사에 참석한 그는 어깨에 동냥자루를 메고 도시의 거리를 걸어 다니곤 했다. 늘 그를 따라다니는 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의 목에는 현금 헌물을 받는 작은 돈주머니가 매여 있었다.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는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를 천상의 보호자로 삼았다.



민중과 동고동락한 ‘거룩한 신부(Padre Santo)’


19세기의 제노바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으로 인한 갈등과 혁명에 필요한 정치적, 사회적 소동으로 들끓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한 가운데에서,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의 크고 작은 걱정거리에 귀를 기울여 주곤 했다. 그들의 걱정거리들은 마치 ‘잔꽃송이’에 묘사된 매력적이고도 경이로운 무수한 이야기들처럼, 도시의 새로운 성장으로 인한 여러 청사진들을 현실적이고도 정확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가정의 어머니들, 가게 주인들, 선원들과 항만 근로자들, 조언을 구한 상인들, 소소한 문제를 안고 있는 어린이들, 아무리 힘든 길이라도 병문안을 거르지 않았던 병자들, 정의를 요구하는 수감자들, 그 모든 사람들이 그 형제에게 그들의 걱정거리를 털어놓았다. 이에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는 어떤 질문을 받기 전에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은사를 주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이 때문에 그는 장래의 일에 대해서도 정확히 예언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의 명성은 도시의 골목과 거리를 넘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에게 수많은 편지들이 도착했고, 모든 편지에 최선을 다해 답장했지만, 불행히도 주고받은 많은 서신이 유실되었다.


카푸친 형제들이라고 그 시절의 사회적 갈등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형제회 내부에서도 화목과 평화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1847년, 당시의 총봉사자가 형제회를 방문해 그들의 분열과 갈등을 해결해보아야 했다. 이 상황 한 가운데에서도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는 자기 자신의 지속적인 회개를 위해 계획한 일에 더욱 더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평화를 이루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고통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다른 형제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거나 친절한 말로 형제들을 도와주고 외롭고 슬픈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리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는 자신이 속한 그 지역 형제회에 크나큰 애정과 정성을 드러냈다. 한편으로는 형제들에게 경고도 했다. 1854년, 형제들이 빨리 집을 사지 않으면 그 집에서 쫓겨나겠다고 예언했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언어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하곤 했다. 그에게 충고를 부탁한 한 사람들에게 “믿음 가지십시오! 믿음을 가지십시오!”라고 말했고, 그의 기도 덕분에 상황이 나아진 사람들이 감사를 표시하면 그는 “나는 아무것도 한 했어요. 성모님께서는 도와주셨어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물론 그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아이들은 그의 성덕과 인내심을 실험해보려 돌을 던지기도 했다. 날아온 돌에 머리에 상처를 입었을 때, 그는 그 돌을 주워서 입을 맞추었다.


1840년, 카푸친 봉사자들은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의 신뢰성과 근면성을 인정하여 “Capo-sportella(주된 바구니라는 뜻)”라는 명칭을 가진 최고의 동냥자, 즉 모든 동냥자 형제들의 지도자의 의무를 그에게 맡겨주었다. 때문에 그는 어깨에 메는 동냥자루 대신 팔걸이가 달린 바구니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 병자들을 위해 보다 질 좋은 음식을 구걸할 수 있게 되었고, 비싼 상품들이 거래 되는 항만 구역에 출입할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는 형제회 안에 창고를 마련하여 헌물들을 관리했고, 형제회 내의 미사 예물도 관리했다. 동냥 형제들을 도시의 다양한 구역에 파견하는 역할도 맡았다. 이 새로운 직무 덕분에 그는 사람들에게 예전보다 더 적절하게 지속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가족 단위나 개개인, 특히 역경에 처해 있는 선원들의 가족들이나 이민자들의 가족에게 전적인 도움을 주었다. 은인들 중에서 개신교 신자들과 유대인들, 무신론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헌금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선행 헌금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확실히 돌아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수도회의 봉사자들 또한 그의 신중함과 균형감각을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권한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의 성격과 관계를 맺는 방식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는 무엇보다도 깊은 밤까지 기도함으로써 그의 신심을 더욱 재차 불타오르게 했다. 실제로 여러 방식으로 기도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내곤 했는데, 거리에 위치한 성당들을 방문함으로써, 형제회의 전례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함으로써 그러했다. 회개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자신을 아주 엄하게 다루었다. 늘 덮개가 없는 나무 널빤지 위에서 잠을 청했고, 식사라고는 물에 적신 빵 껍질 몇 개로 만족했다. 그리고 늘 천을 덧 댄 낡은 수도복을 입었고, 항상 맨발로 돌아다녔다. 하루 한 번만 식사했고, 까칠한 털 셔츠를 입고 자신의 몸을 자주 채찍질했다. 그렇지만 고행을 절제하라는 봉사자들의 충고에는 영적인 자유로 기꺼이 순종했다. 그의 성덕은 참으로 사람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직접적이면서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덕성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었고,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는 한때 선교사가 될 꿈을 품었지만 나이와 다른 상황들 때문에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오! 다시 젊었다면. 그랬다면 우리 선교사들과 함께 나섰겠지요!” 또한 그는 성소자 양성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사제가 될 가난한 청년들을 위해 물질적으로도 자주 도움을 주었다.


동시대의 석판 인쇄에서 화가들은 그를 수염이 긴 흑발의 키가 큰 날씬한 사람으로 그렸고, 대부분 동냥 바구니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 옆에 헌물 돈주머니를 든 작은 소년이 그려져 있다. 십자고상이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도 있다.



사랑의 희생자


1866년, 제노바 항만에 들어온 상선에서 최초로 콜레라가 발견되면서부터 모든 선박이 검역을 받긴 했지만, 8월 5일, 콜레라는 이미 시내에 퍼진 상태였다. 사람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극복한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는 자신을 사랑을 위한 희생자로 바쳐지길 바라며 병자들을 돕기 위해 그들 한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8월말, 232건의 콜레라 감염 사례가 보고되었지만, 이미 130명 사망자를 낸 상태였다.


1866년 9월 15일,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는 콜레라에 감염되었고, 그로부터 이틀 후 선종했다. 납으로 된 관에 놓인 그의 시신은 신속히 스탈레노(Staglieno) 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제노바시의 콜레라 감염자 수가 신속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몇 주 이내에 그 전염병은 완전히 근절되어 버렸다. 이에 시민들은 이 기적 같은 일이, 그들이 사랑하고 그들을 사랑해 준 ‘거룩한 신부(Padre Santo)’ 프란티스코 마리아 형제의 희생과 기도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때쯤, 늘 교회에 대한 반감을 가진 제노바의 정부는 카푸친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866년 12월 29일,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의 예언대로 정부는 석 달 만에 형제들의 집을 점유해 버렸고, 그곳에서 형제들을 쫓아내 버렸다. 이 때문에 형제들은 그로부터 근 40년간을 바깥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결국 1905년이 되어서야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가 살 수 있게 되었다.


1911년, 프란치스코 마리아 형제의 시신은 카푸친 무염시태 성당으로 이장되었고, 1929년 6월 30일, 비오 11세 교황께로부터 시복을 받았다. 그리고 1962년, 복자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시성을 받았다.


“하느님의 뜻은 항상 올바르고 항상 거룩하며 항상 사랑스럽고 아버지다운 것입니다.. 한 시간의 고통이 백년의 즐거움보다 더 귀중합니다. 주님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우리 자신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세상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침묵과 고행과 기도를!” - 캄포로소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


[출처 : 카푸친작은형제회 홈페이지]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