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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나르디노 레알리노

성 베르나르디노 레알리노(Saint Bernardino Realino)

축 일 : 7월 02일

신 분 : 증거자

활동 지역 : 나폴리, 레체 등(Napoli, Lecce)

활동 년도 : 1530-1616년

같은 이름 : 베르나르디누스, 베르나르딘


성 베르나르디누스 레알리노(Bernardinus Realino, 또는 베르나르디노 레알리노)는 1530년 이탈리아의 모데나(Modena) 부근 카르피(Carpi)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랑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성장하여 법조계에 투신한 후 몇 년이 지나 34살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그는 성 이냐시오(Ignatius)의 초기 동반자 중 한 명인 알폰소 살메론(Alfonso Salmeron) 신부에 의해 나폴리(Napoli)에서 수련을 받았다. 그 후 나폴리에서 10년간 사목하며 설교와 교리교육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이와 수감자들을 위해 일했다.


그의 성덕과 빛나는 설교로 인해 그는 현세 생활에서도 성인으로 인정받았을 정도였다. 신자들과 함께 사목활동을 한 후 그는 레체(Lecce)의 대학 강단에 섰으며 결국 학장이 되어 삶의 전부를 보냈다. 사망하기 6년 전에 넘어져서 다친 두 곳의 상처가 평생 낫지 않았다. 그리고 죽기 전 마지막 병석에서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를 병에 담아 보존하였다. 그는 1616년 레체에서 선종하였다.


그 피는 다양하고도 특이한 방법으로 움직였다. 어떤 용기에서는 100년이 지나도록 액체 형태로 남아 있었다. 다른 용기에서는 거품이 생겨 그 양이 늘어난 듯이 보였다. 또 다른 하나에서는 성인의 기일에 성인의 혀를 담고 있는 유해함 근처에 피가 담긴 용기를 가져갔을 때 그 피가 “끓고” 거품이 일었던 일이 목격되기도 하였다. 1634년 교회 당국자의 참여 하에 성 베르나르디누스의 무덤이 개방되었다. 많은 양의 시신이 수습되어 뼈와 분리된 후 두 개의 유리병에 옮겨져 유골과 함께 다시 매장되었다.


성해를 입증하기 위해 증인의 참여하에 1711년에 레체의 주교는 다시 그의 무덤을 열었다. 유리병 하나는 부서졌지만 다른 병에 있는 신체조직들은 변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고 진한 붉은색 액체 속에 담겨 있었다. 의사들은 이것이 피라는 사실을 밝혀내었고, 그 보존 상태와 달착지근한 냄새는 기적적인 일이라고 증언하였다. 2년 후 경신성사성성에서 지정된 세 명의 주교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피가 액체이며 진홍색을 띠고 거품이 인다는 것을 검사했다. 1804년 레체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성인의 피를 담당하고 있던 게타노 솔라초(Gaetano Solazzo) 신부는 그 피가 액체 상태이고 두 번이나 거품이 일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남겼다.


수녀들 역시 이 사건을 목격했으며 한 예수회 사제도 1852년에 그러한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는 것을 맹세하는 선언문을 남겼다. 이런 사실은 그와 비슷한 현상들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믿을만한 일이라는 의미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1895년 더 이상 액체 상태로 남아있는 혈액을 찾을 수 없었다. 성 베르나르디누스는 1895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후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홈

[예수회의 성인들] 성 베르나르디노 레알리노베르나르디노


레알리노는 1530년 12월 1일 이탈리아의 모데나 근처 카르피에서 태어났다. 학습능력이 출중했던 그는 모데나에서 그리스 어와 라틴 어를 습득한 후, 1548년에는 명문 볼로냐 대학에서 철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이어서 같은 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이는 당시의 젊은이들이 출세하는 엘리트 코스였다.


1556년에 학위를 받고 당시 밀라노 추기경의 추천을 받아 펠릿차노 시의 시장 겸 시 법원의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펠릿차노에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베르나르디노는 33세가 되던 1564년, 나폴리 귀족의 고문 변호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베르나르디노가 예수회원을 처음 만난 것도 나폴리였다. 나폴리의 예수회 성당에서 설교를 듣던 중 감명을 받고 설교를 담당했던 신부에게 총고해를 청하였다. 총고해를 하고 나서 고해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8일 피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 피정기간 동안 특별한 은총을 체험하고 성모 마리아의 사적 계시를 통해 예수회 입회를 결심하였다. 그가 예수회에 입회한 것은 나폴리에 부임하던 1564년 10월 13일이었다. 처음에는 평수사를 지망하였으나 주위로부터 사제 지망생이 될 것을 추천받았다. 첫서원을 발하고 얼마 있다가 그의 탁월함을 알아본 장상은 그에게 사제서품 준비를 명하였다. 그리하여 1567년 5월 24일 그는 첫서원을 발한 지 채 일년도 안 된 상태에서 사제로 서품받았다. 그리고 곧 보르하 총장에 의해서 나폴리의 수련장으로 임명되었다. 수련장의 일을 아주 훌륭히 수행하면서 나폴리 시민들을 위한 교리교육과 설교, 많은 이들을 위한 고해성사 그리고 노예들을 위한 영적인 봉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영적지도는 탁월한 것이었고 많은 이들을 회심으로 이끌었다.


1574년 베르나르디노 신부는 아플리아 지방의 렛체라는 도시에 예수회 학교와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해서 책임자로 파견되었다. 렛체 사람들은 곧 베르나르디노 신부의 거룩함에 감동을 받고 예수회에 기꺼이 교회와 학교와 수도원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였다. 이후 자신이 죽을 때까지 42년간 렛체에서 사목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많은 이들이 몰렸고 특히 그의 고해성사는 많은 이들을 회심으로 이끌었다. 그는 그밖에도 타 수도회를 방문하여 조언을 하였고 또 많은 젊은 사제들에게 고해성사를 잘 듣는 기술에 대해서 가르쳤다. 베르나르디노 신부가 살아있는 동안에 렛체에서 병이 치유되는 기적 등이 일어났는데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살아있는 성인인 베르나르디노 신부의 기도 덕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베르나르디노 신부는 1616년 6월 11일 중병을 얻어 입원하였다.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많은 이들이 베르나르디노 신부의 마지막 임종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서 방문하였다. 렛체 시장은 베르나르디노 신부에게 천국에 가서 렛체 시의 수호성인이 되어줄 것을 특별히 부탁했다. 7월 2일 ‘성모 마리아’를 부르면서 숨을 거두었다.


1895년 9월 27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고, 1947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서 시성되었다. 기념일은 7월 2일.


얀센스 전 예수회 총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베르나르디노 신부의 성성을 기렸다. “그는 평범한 사목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성성을 드러낸 분이었습니다. 그는 청소년들을 길렀고 사람들을 하느님께 이끌었으며, 특히 고백소와 형무소와 병원 등지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했습니다.”


[이냐시오의 벗들, 2013년 8월호, 구정모 마르코 신부(일본 상지대학교 교수)]


성 베르나르디노 레알리노(St. Bernardino Realino, 7월 2일)


1530~1616년,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예수회 사제.



성인은 이탈리아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며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성인은 의사가 되려 했지만, 법을 공부해야 사회적으로 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성인은 변호사와 판사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습니다. 원칙을 준수하는 공정하고 정직한 판결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또 집안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26세의 젊은 나이에 시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부와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종종 허무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세속적 성공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월급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인은 예수회 8일 피정에 참가합니다. 피정 중에 성소를 고민한 성인은 성모님의 환시를 봅니다. 이를 계기로 성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회에 입회합니다. 성인은 수련 기간 동안 누구보다 성실히 살았습니다. 워낙 화려한 이력을 지녔던 터라 수도회 생활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수군대던 이들도 많았지만, 성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귀족 집안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생활했습니다.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언제든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빈민 지역을 찾아가 가난한 이들을 위로했고, 교도소와 병원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 이야기를 정성을 다해 들어주는 성인에게 감동했습니다. 성인이 고해성사를 주는 날이면, 성당 주변은 고해성사를 보러 온 이들로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성인은 또 탁월한 교리교사였습니다. 수도회 수련생들의 교육을 도맡으며 예수회원 양성에도 힘썼고, 예수회 대학 학장을 지냈습니다.


성인은 40년 넘게 이탈리아 레체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수도회 부름을 받고 나폴리나 로마 등지로 사목 활동지를 옮기려 할 때마다 병이 나거나 날씨가 나빠져 이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도회 장상들은 이를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였고, 성인이 선종할 때까지 레체 지방에서 사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인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성모 마리아’를 부르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성인은 1947년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28일, 박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