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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베르토 슈미엘로프스키

성 알베르토 슈미엘로프스키 (Saint Albert Chmielowski)


축 일 : 6월 17일

신 분 : 설립자, 수사

활동 지역 : 크라쿠프(Krakow)

활동 년도 : 1845-1916년

같은 이름 : 알버트,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앨버트, 흐미엘로프스키, 흐미엘롭스끼


1845년 8월 20일 폴란드 이고알로미아(Igoalomia)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알베르투스 아담 슈미엘로프스키(Albertus Adam Chmielowski, 또는 알베르토 슈미엘로프스키)는 가족 소유의 부동산 관리를 위해 농업을 공부하였다. 젊어서부터 정치에 관여했고, 17세 때에는 폭도들과 싸우다가 다리를 잃었다. 크라쿠프에서 그는 인기 있고 잘 알려진 형편이 좋은 예술가였다. 정치와 예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인식을 갖게 해주었다. 온화하고 열정적인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것에 대한 소명을 느꼈다. 그는 몇 년간의 반성을 통해 이 원의가 하느님께서 봉사에로 부르시는 성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작은 형제회 제3회에 들어가 알베르투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예술을 그만둔 그는 크라쿠프에서 극빈자들을 위한 삶을 시작했다. 1887년 그는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 알베르토회 또는 그들의 거친 회색 의상으로 인해 회색 형제회로도 알려진 가난한 이들의 종인 작은 형제회 제3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891년에 여자 제3회(회색 자매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과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였다.


성 알베르투스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재앙은 불쌍한 형제자매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가진 이’들이 ‘가지지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그들로부터 떨어져 지내며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보살피도록 방치했다고 비판하였다. 훗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된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는 1949년에 성 알베르투스에 관한 유명한 연극의 대본을 썼는데 1997년에 ‘우리 하느님의 형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1916년 12월 25일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선종한 그는 1983년 6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크라쿠프에서 복자품을 받았고, 이어 1989년 11월 12일 같은 교황에 의해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출처 :가톨릭 홈

레닌을 알았던 성인 아담 슈미엘로프스키


성탄절에 돌아가신 성인을 아는가?


이 성인은 사회적인 문제를 두고 레닌과 논쟁을 벌인 것으로서 유명하다. 또 한가지 단서를 들자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 성인에 대해 “우리 하느님의 형제”라는 희곡을 썼다. 이 성인은 아담 슈미엘로프스키로서 수도명은 알베르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성탄절에 크라쿠프에서 선종하였다. 그가 죽자 비를 맞으며 장지까지 따라간 운구 행렬은 수천 명에 이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6월 22일 아직도 계엄 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던 조국 폴란드를 방문하여 크라쿠프에서 그를 시복하였다. 교황은 다시 1989년 11윌 12일 로마에서 그를 시성하였다. 그러나 폴란드 밖에서 이 성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지난 봄에 알베르또 성인을 알아보기 위하여 폴란드로 갔다. 크라쿠프 교외에서 나는 폴란드의 전통적인 양식으로 최근에 지어 놓은 한 성당을 발견하였는데 벽에는 하얀 칠을 해놓았고 지붕은 뾰족했다. 이 성당은1891년 성 알베르또가 설립한 성 알베르또 수녀회의 모원이 있는 성당이었다. 이 수녀회는 현재 600여 명의 회원이 있는데 회원들은 특히 노인 환자들과 정신병 환자들을 돌보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와 미국에도 진출해 있다. 성인이 세운 수도회도 있는데 수사의 수는 약 100명이나 된다.


성당의 제단 위에는 “이 사람을 보라”라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나는 알베르또 성인이 헌신적인 사랑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림 솜씨로도 유명하였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인상적인 작품에서 그리스도는 심장 모양으로 포개져 있는 옷을 입고 있는데 거기에서 채찍 자국도 찾아볼 수 있다. 가시관이 짓누르고 눈을 감은 모습이어서 마치 수의를 입고 계신 듯이 보인다.


그런데 뇌리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이 작품이야말로 화가 아담 슈미엘로프스키를 가난한 사람들의 종인 알베르또 수사로 만들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인해 그는 회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하여 시인 제라르드 맨리 홉킨스가 말한 “하느님의 더 나은 아름다움과 은총”을 발견하였고, 이 작품으로 그의 예술에 대한 추구도 끝을 맺은 것이다.


성 알베르또는 1845년 9월 20일에 크라쿠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와 러시아 사이의 국경에 있던 세관에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자 아담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담은 열일곱 살이 되던 1863년에 국수주의자들의 봉기에 가담하여 부상을 입고 러시아 군인의 포로가 되었으나 다행히도 시베리아 유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왼쪽 다리 무릎 아래를 잘라야 하였다. 이 수술은 그에게 일생 동안 고통을 남겨 주었을 것이다.


아담은 그림에 있어서 언제나 뛰어난 재능을 보여 왔다. 그러나 1866년에 러시아인들이 바르샤바 아카데미를 폐쇄하는 바람에 뮌헨 미술 학교에서 5년(1869~1874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곳에서 폴란드의 지식과 예술의 중심지언 크라쿠프에 돌아온 후에는 화가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슈미엘로프스키는 바르샤바의 정기적인 전람회 출품을 기다리며 초상화만 그리며 일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크라쿠프의 사교계에 발을 들여 놓고 자유 분방한 생활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은 그런 길이 아니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 아담의 삶이 바뀌었는지는 결코 모르지만 당시 그가 크라쿠프의 비참한 가난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고자 하는 그의 첫 번째 시도는 결국 실패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서른다섯의 나이에 예수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담은 지나친 강박증으로 인한 신경 쇠약 때문에 겨우 육 개월의 수련기만 마치고 예수회를 나오게 된다. 신경 쇠약에서 벗어나는 데는 일년 이상이 필요하였다.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그는 마을의 성당들을 복원하였다.


이 무렵 아담은 “이 사람을 보라”를 손대기 시작하였고 어딜 가든지 이 작품을 구상하고 다녔다. 크라쿠프의 지하실에서 보았던 얼굴이 그림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아담은 프란치스꼬 재속 3회 회원이 되었고 빈첸시오회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욱더 효과적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알베르또 경당 지하실에는 19세기 크라쿠프에서의 그의 삶을 보여 주는 사진과 유품이 있다. 알베르또의 속죄 과정과 수양 과정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성 요한”을 복제한 그림도 볼 수 있다. 또한 아담의 담뱃갑도 있는데 흡연은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마침내 “이 사람을 보라”가 완성되자 아담은 이 그림을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마련한 숙소에 걸어 두었다. 이방은 고작해야 찌그러진 탁자가 있는 형편없는 움막에 지나지 않았다.


1889년에 아담은 자신의 수도회를 세울 충분한 협조자를 모으게 되었다. 그는 회원들이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그리스도를 나누어야 하므로 회원들이 형제들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번 방문 동안 나를 지하실로 안내해준 한 수녀는 알베르또 성인은 사제가 되기를 원치 않았으며 형제들도 사제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건 왜일까? 그것은 사제라는 신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가르멜회의 어떤 친구가 충고해 줬기 때문이었다.


후에 나는 성 플로리아노 본당 관할 구역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카롤 보이티야가 1950년대초에 신부로 사목하였던 곳인데 아마도 당시의 본당 신자들은 대부분이 알베르또 성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젊은 보이티야 신부도 바로 이 거리를 걸으면서 성인이 보았던 가난을 보고 성인이 기도하던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성인을 매우 친근하게 느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실제로 교황이 “우리 하느님의 형제”라는 희곡을 쓴 때도 이 무렵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바로 이 희곡을 통하여 동료 예술가로서 알베르또에게 다가갔음이 분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블라디미르 레닌도 알베르또 수사가 활동하던 당시 크라쿠프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레닌과 알베르또와의 만남은 꽤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자코파네 산들을 함께 오르며 정의와 사랑을 비교하며 토론을 하였다. 레닌은 분명히 러시아 정교회보다 로마 가톨릭이 공산주의를 준비하는 데 더 낫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우리 하느님의 형제”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베르또와 마르크스주의 행동가인 어떤 “낯선 사람”이 나눈 긴 대화가 있다. 이 희곡에서 두 등장 인물은 모두 불의한 사회를 변혁하는 데 실패하고 둘 다 많은 동조자를 얻지 못한다.


두 사람은 대부분 분노를 다루는 문제를 두고 논쟁하고 있다. 알베르또는 레닌과 같은 인물을, 가난한 이들의 분노를 착취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쟁취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를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베르또는 창조적인 분노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는다. 알베르또는 희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분노는 그것이 위대한 것이라면 분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는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지속될 것이다. 나는 더 큰 자유를 선택해 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 희곡의 요점은 가난한 사람들이 알베르또를 따르지 못하자 그가 그들을 따르기로 작정했다는 데 있다. 그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진정으로 그들을 섬길 수 있다고 결심한 것이다.


(가톨릭 헤랄드 1990년 1월호에서 고재섭 옮김)

[경향잡지, 1990년 12월호, 피터 헤블레스웨이트]

[금주의 성인] 성 알베르토 슈미엘로프스키(Albert Chmielowski, 6월 17일)




낮은 곳으로 눈을 돌리다, 성당 벽화에 감명 받아 회심, 가난한 이들에 헌신

1845-1916. 폴란드 출생 및 선종. 수사. 알베르토회 설립.


성 알베르토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신앙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프랑스 파리와 독일 뮌헨에서 유학하며 그림을 배웠고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폴란드로 돌아와 떠오르는 신인작가로 명망을 얻습니다. 쾌활한 성격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해 사교계에서도 인기가 좋았습니다. 정치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던 그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크게 다쳐 왼쪽 무릎 아래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성인은 어느 날 한 성당 벽에 그려진 ‘에케 호모’(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그림을 보고 큰 감명을 받습니다. 가시관을 쓰고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예수를 포현한 이 그림에서 그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처럼 성인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는 빈민가로 눈을 돌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다가갑니다. 프란치스코 재속회의 빈첸시오회에서 활동했고 천대받는 장애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해줘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습니다. 성인은 가난한 이들에게 좀 더 투신하기 위해 1887년 직접 수도회를 설립합니다. 회색 수도복을 입어 회색 형제회로도 알려진 이 수도회는 그의 이름을 딴 알베르토회로 불립니다.1891년에는 수녀회도 설립합니다.


성인은 이 같은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한몸에 받았지만 늘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살려 틈틈이 가난한 성당 성화의 벽화를 복원하는 일도 병행했습니다. 성인은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됩니다. 성인 삶을 모범으로 삼았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50년 사제 시절, 성인 일대기를 주제로 한 희곡 ‘우리 하느님의 형제’를 쓰기도 했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12일, 박수정 기자]

성 크라쿠프의 알베르토 흐미엘로프스키


알베르토 수도회 · 수녀회 창립자




성 알베르토 흐미엘로프스키(Albertus Chmielowski, 1845-1916)는 유럽이 대혼란기에 있던 1845년 8월 20일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ow) 인근 아다민 이고워미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의 시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과 민중들의 삶에 대하여 눈뜨기 시작하였으며, 17세이던 1863년에는 폴란드의 해방을 위해 일어난 민중봉기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한쪽 다리를 잃었다.


심각한 부상에서 회복되자 그는 예술로 믿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재능이 미술계에 알려지면서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았고 그의 작품도 매우 훌륭한 예술품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알베르토 흐미엘로프스키는 그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살고 있던 시대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악(惡)에 대하여 고뇌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심은 자연 그를 하느님께 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프란치스코회(Franciscan) 제3회 회원이 되어 ‘알베르토’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887년 알베르토는 거친 옷감의 회색 수도복을 입고 수도회를 창립하였는데, 이 수도회는 이후 ‘가난한 이의 종 프란치스코회 제3회 수사회’(Brothers of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 Servants of the Poor), 또는 ‘알베르토 수도회’(Albertines)라고 불렸다. 1891년에는 같은 정신으로 여자 수도회를 창립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죽을 쑤어 줄 수 있는 부엌을 마련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자선 활동을 펼쳐나갔다. 알베르토는 이러한 자선 활동을 하다가 1916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크라쿠프에서 선종하였다.


1983년 6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그를 시복하였고 1989년 11월 12일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시성식에서 교황은 이 새로운 성인을 두고 “왜 영혼을 내어 드려야 하는지를 깊이 이해하였으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지치지 않고 영웅적으로 자신을 온통 바친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이 시성식이 있은 다음 몇 해 뒤인 1997년 6월 6일, 교황은 또한 알베르토의 영적 딸인 마리아 베르나르디나 자브론스카(Maria Bernardina Jablonska, 1878-1940)를 시복하였다. 성 알베르토 흐미엘로프스키의 축일은 6월 17일이다.


[교회와 역사, 2011년 7월호, 번역 송영웅 바오로(봉명학원 재단이사)]

참고자료


■ 발터 닉 저, 정 가밀라 역, 회심자들 - '가장 비천한 곳에서: 폴란드의 알벨또', 왜관(분도출판사), 1987년, 169-196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 크라쿠프의 알베르토 흐미엘로프스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253-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