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율리아 빌리아르(Saint Julia Billiart)

04/07/2016

성녀 율리아 빌리아르(Saint Julia Billiart)

 

 

 

축         일  :    4월 8일

신         분  :    수녀 설립자

활동 지역  :    프랑스 나무르(Namur, France)  

활동 년도  :    1751-1816년

같은 이름  :     줄리아, 쥴리아, 쥴리아나, 율리아나


 

성녀 율리아 빌리아르는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 지방의 보베(Beauvais) 교구에 속한 퀴비이(Cuvilly)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마리아 로사 율리아(Maria Rosa Julia)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늘 신앙생활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왔는데, 특히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녀는 신비스런 병으로 마비되어 걷지 못하였고, 혁명 정부에 선서한 사제들을 반대하고 또 도망을 다니는 사제들을 숨겨준 일들이 정부 당국에 알려지자 자신도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얼마동안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아미앵(Amiens)에 머물렀다. 후일 그 친구들이 그녀가 수도회를 설립하였을 때 초기 회원들이 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신앙의 사제회' 원장 신부인 바랭(R. P. Varin) 신부를 만났다.

 

1804년 성녀 율리아는 자작 부인 프랑수아즈(후에 수도명을 요셉이라 함)와 함께 아미앵 교구장의 후원과 바랭 신부의 지도하에 노트르담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가난한 어린이들의 종교교육과 신앙교사들의 훈련 및 여성들의 그리스도교 교육에 헌신하려는 목표로 설립되었다. 그들은 고아원도 개설하였다. 그리고 수녀원이 설립된 해에 성녀 율리아는 아미앵 선교 도중 앙팡탱 신부가 9일 기도를 바친 후 자신에게 걷도록 명했을 때 기적적으로 걷게 되었다. 그러나 바랭 신부가 떠나고 그의 후계자로 노트르담 수녀회의 고해사제로 임명된 신부가 이 수녀회에 대하여 반목하는 처지로 돌변하자, 아미앵의 주교는 1809년 내에 성녀 율리아로 하여금 아미앵 교구를 떠나도록 명하였다.

 

그래서 성녀 율리아는 수녀회 모원을 벨기에 남부, 프랑스와 국경을 이루는 나무르로 이동하였다. 물론 그 사건은 나중에 무마되었지만 그녀는 모원을 그곳에 그냥 두었다. 그녀는 여생을 수녀회의 확장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으며 15개의 수녀원이 세워지던 1816년 4월 8일 과로와 노환으로 나무르에서 운명하였다. 그녀는 1906년 5월 13일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69년 6월 22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홈

[금주의 성인] 성녀 쥴리 빌리아르(St. Julie Billiart, 4월 8일)

 

 

 

노틀담수녀회 어머니...교리 교육, 수도자 양성에 남다른 열정

1751-1816. 프랑스 피카르디 출생. 노틀담 수녀회 영성의 어머니

 

가톨릭 교리에 일찍 눈을 뜬 성녀는 7살 때 이미 하느님 말씀과 가르침을 깨우쳐 또래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정도였다.

 

성녀의 남다른 영적 성장을 눈여겨 본 지역 본당 사제는 성녀가 9살이 되던 해 첫영성체를 허락했다. 그 당시 첫영성체는 13살이 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성녀는 성체를 영하면서 순결과 정절을 지킬 것을 스스로 다짐했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갔다.

 

성녀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밭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밭일을 하면서도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자 마을 사람들은 16살 어린 소녀의 가르침과 영성에 탄복하며 성녀를 살아있는 성인이라고 부르곤 했다.

 

성녀가 22살이 되던 해 집안에 무장 강도가 들었다. 그 때 충격으로 쓰러진 성녀는 하반신이 마비돼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20년 넘게 침대에 누워 생활했지만 성녀는 매일 성체를 영했고 묵상과 기도의 삶을 이어갔다. 성녀는 움직일 수 없게 됐지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마을 어린이들은 성녀의 침대 주변에서 교리를 듣곤했다.

 

어느날 기도 중에 수녀들에게 둘러쌓인 십자가 예수의 환영을 보게 된 성녀는 이후 여성 성소자들을 양성하는데 더욱 매진하게 된다. 성녀는 1803년 프랑스 아미엥에서 8명의 여자 고아들을 모아 가르치는 것으로 노틀담수녀회 설립 기초를 닦았다.

 

이듬해 기적적으로 하반신 마비가 풀리자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기쁘게 달려가 교리를 가르쳤다. 벨기에로 건너간 성녀는 나뮤르지방에 노틀담수녀회를 설립한 것을 비롯해 선종하기 전까지 15개의 수녀원을 설립하며 수도자 양성에 힘썼다.

 

성녀는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평화신문, 제1013호(2009년 4월 5일), 박수정 기자]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 성 율리아 빌리아르

 

 

 

노틀담 수녀회 창립

 

한여름에 활짝 핀 해바라기는 해를 향해 웃는 해맑은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노틀담 수녀회’를 창립한 성녀 율리아 빌리아르(1751-1816)는 일상의 작은 일부터 영성생활의 가장 깊숙한 면까지 통틀어 하느님을 향하는 해바라기처럼 살고자 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은 성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웃는 성녀’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1751년 프랑스 퀴비이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쥴리는 천성적으로 쾌활하고 적극적인 소녀였다. 그녀는 성체께 대한 돈독한 신심으로 14세 이하의 어린이에게 금지된 첫영성체를 9세 때 할 수 있었고 14세 때는 스스로 동정서원을 하는 등 신앙적으로 조숙한 면을 보였다.

 

배운 것도 없고 부유하지도 않았던 율리아는 생계에 대한 책임을 부모와 함께 져야 했다. 따라서 그녀는 들판에서 농부들, 잡역부들과 날품팔이를 하기도 했으나 일하는 중에도 틈이 나면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곤 했다. 율리아의 이런 개방적이고 명랑한 성격은 천차만별의 사람들로부터 호감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율리아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오! 좋으신 하느님! 당신은 얼마나 좋은 분이십니까!”라고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했다. 그러나 율리아의 이런 찬미는 하느님이 그녀에게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율리아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병석에 누워있어야 하는 고통을 겪었다.

 

23세 되던 해인 1774년, 율리아는 작은 상점을 경영하던 부친이 괴한으로부터 습격당한 사건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신체에 마비 증상을 보였다.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8년 뒤에는 의사의 실수 때문에 아예 치료가 불가능한 전신마비라는 극도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그리고 이런 생활은 율리아가 53세가 될 때까지 30년간 계속됐다.

 

남의 도움 없이는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된 율리아는 이런 커다란 시련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현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율리아가 밖으로 나가 말씀을 전하는 대신, 그녀의 침상 곁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주셨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병상에 누운 그녀에게 와서 위로와 가르침을 받고 돌아갔다.

 

가난하고 불쌍한 어린이들, 못 배운 부인네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싶다는 열망은 1804년 율리아로 하여금 공동체를 이루려는 시도를 하게 한다. 그리고 이때 하느님은 전신마비였던 율리아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율리아의 일에 불꽃을 당기셨다. 치유 기적을 받은 그녀는 선종할 때까지 12년 동안 프랑스와 벨기에를 무려 1백 20번이나 오갔다. 사람들은 이런 그녀를 ‘걸어 다니는 하느님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율리아의 고난은 수도회를 이룬 뒤에도 계속됐다. 그녀는 당시 수도자들이 행하던 생활 규범과 관습을 시대적 요청에 따라 쇄신하고자 했으나 보수주의적인 성직자들의 거부로 추방당해 벨기에 나뮈르에 정착하게 된다. 율리아의 정신은 그녀 사후에 1828년 네덜란드 아메스폴트, 1850년 독일 코스펠트로 확산, 각기 세 개의 독립적인 수녀회로 발전했다.

 

현재 한국에 진출한 노틀담 수녀회는 ‘코스펠트 노틀담 수녀회’로서 이 수녀회의 직접적인 창립자는 알데곤다 볼브링, 리셋테 큘링이라는 젊은 여교사들이다. 이 두 처녀는 나뮈르에서 아메스폴트로 전해진 율리아의 정신과 수도회칙을 받아들였고, 후대 회원들도 율리아를 ‘영성의 어머니’로 모시고 있다.

 

“수녀님들, 마차를 타고 천국에 갈 수 없어요. 걸어서 천국에 갑시다.” 율리아는 회원들에게 한걸음씩 꾸준히 걸어 착실하게 하느님께 나아가자고 독려했다. ‘걸어서 천국을’이라는 말 안에서 표현되는 여성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상적인 모든 일을 겸손되게 받아들이자는 단순성과 순박성이다. 즉 하느님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순리대로 하루 한 순간을 성실히 살아감으로써 천국에 이르자는 것이다.

 

따라서 율리아는 주님에게 모든 것을 내맡길 자세를 갖춘 단순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도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날에도 구름 위에 해가 떠 있음을 단순하게 믿고 기뻐하는 하느님의 해바라기였다.

 

고통으로 전화된 미소를 영혼 안에 새긴 ‘웃는 성녀’ 율리아는 하느님의 좋으심을 끊임없이 찬양한다. 그리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미와 사랑을 이같이 노래하고 있다.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모든 것 다 하십시오. 오! 얼마나 좋으신 하느님이신가! 좋으신 하느님은 항상 좋으시고 아주 좋으십니다. 언제나 가장 좋게 하여 주십니다.”(서한 44)

[평화신문, 1996년 4월 28일, 남기은 기자]

[영성의 뿌리] 성녀 빌리아르

 

 

전신 마비 중에 노틀담수녀회 창설

 

노틀담수녀회의 영성은 성녀 빌리아르(St. Julie Billiart)에 뿌리를 두고 있다.

 

 

1751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성녀는 14세의 나이에 스스로 동정 서원을 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그러나 1774년 23살의 나이에 신경 조직이 마비되는 증세가 나타나고, 1782년에는 의사의 부주의로 회복 불가능한 전신 마비의 불구자가 돼 30년 간 병상에서 지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성녀는 하느님 사랑에 보답하고자 일생을 어린이와 부녀자들의 교육을 위해 바칠 것을 맹세하고, 동료들과 1804년 노틀담수녀회를 창설했다.

 

그 해 성녀는 예수 성심께 완치의 은혜를 구하는 9일 기도를 드리고 병이 완쾌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성녀는 더욱 전교에 힘써 ‘걸어 다니는 하느님의 사랑’이라 불리기도 했다. 평생을 신앙 전파에 힘썼던 성녀는 65세 때인 1816년 4월 8일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

 

1848년 무렵 성 람베르트 성당 소속 학교의 여교사 2명은 독일 쾨스펠트에서 새로운 수녀회의 기초를 마련했다. 빌리아르 성녀의 삶과 노틀담수녀회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이들은 자신의 집에 고아들과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들이고 교육하며 평생을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당시 이들을 지도하던 본당 보좌 테오도르 엘팅 신부는 노틀담수녀회가 두 여교사가 시작한 공동체의 목적과 같은 사도직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게 돼, 노틀담수녀회를 초대해 두 여교사를 양성하게 했다. 여교사 힐리곤데 볼브링은 마리아 알로이시아 수녀가, 엘리사벳 큘링은 마리아 익나시아 수녀가 됐다.

 

한국 노틀담수녀회는 이 쾨스펠트 노틀담수녀회 소속이다.

 

1967년 한국에 진출한 수녀회는 1975년부터 경기도 오산에 새로 유치원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1977년 ‘노틀담유치원’을 개원했다. 초기 수녀들은 경기도 벌읍리 지역으로 나가 마을회관에서 이동 유치원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한국 최초로 몬테소리 유아교육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노틀담유치원’은 몬테소리 교육과 국가 누리교육과정, 인성교육을 위한 실천교리(RPP), 음악 교육인 오르프 수업 등에 교육 원칙을 두고 있다. 또한 수녀회는 교구 내 성남대리구 분당성마리아본당 유치원과 안산 대덕어린이집 등에서도 교육 사도직에 힘쓰고 있다. 결손, 조손 가정 등 부모 돌봄의 손길이 부족한 아이들의 공동생활가정인 ‘하늘땅이네’와 노인요양시설 ‘노틀담사랑터’도 운영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5년 5월 31일, 김진영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노틀담수녀회

 

 

 

창립과 영성

 

'Toute a Jesus par Marie'(모든 것을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을 위해)

 

 

노틀담수녀회 수녀들이 종신서원과 함께 간직하게 되는 반지에 새겨진 이 모토는 수녀회 영성을 하나로 집약하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여기서 '예수님을 위해'가 의미하는 바는 회원들이 수행하는 기도와 사도직 활동등 전 생활이 하느님의 좋으심에 대한 유일한 응답임을 드러내는 표지다.

 

노틀담수녀회의 영성은 특이하게도 두 여인의 우정에서 출발한다. 1969년 로마에서 시성된 프랑스의 성녀 쥴리 빌리아르와 그에게서 영적 지도를 받았고 수녀회 설립에 전 재산을 기부한 프랑소와 블랭 드 부르동 귀족의 만남이 그것이다.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도 돈독한 우정의 관계를 유지했던 이들은 프랑소와가 쥴리를 도와 성실하게 계속적으로 후원해 주는 모습 속에 1804년 가난하고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돌보는 수녀회 창설로 이어지게 된다.

 

프랑스에서 벨기에 나뮤르로 옮겨진 수녀회는 네덜란드 아메스포트에서 온 지원자들을 양성했고 여기서 양성된 수녀들이 독일 코스펠트의 힐리곤데 볼브링과 엘리사벳 큘링 등 두 여교사에 의해 세워진 공동체에 수녀회 회헌과 정신을 전하게 됨으로써 현재의 노틀담수녀회로 성장하는 과정을 가진다.

 

이런 배경에서 노틀담 수녀회의 영성은 다양한 색깔이 겹쳐진 무지개처럼 한 가닥 실을 꼬아놓은 것처럼 이루어져 있다. 성녀 쥴리 빌리아르가 하느님의 좋으심에 대한 깊은 체험을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어린이 교육을 통해 세상에 드러냈고 이같은 성녀의 정신적 유산은 아메스포트 노틀담 수녀들을 통하여 코스펠트 노틀담 수녀회의 창설자인 마리아 알로이시아 수녀에게 전달된 것이다.

 

결국 성녀 쥴리 빌리아르에게 보이신 체험이 한 맥으로 이어져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 주는 수도 공동체로 보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노틀담 수녀들에게 있어서 기도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표징인 그 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몫입니다"라고 하면서 일생을 겸손하고 기쁘게 사신 창설자 마리아 알로이시아 수녀를 따라 회원들은 어디를 가든지 기쁘게 살고 있음을 가까이서 발견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특히 회원들은 성녀 쥴리 빌리아르의 카리스마를 통해 생활과 사도직 속에서 교회 안의 생기와 활력을 발하는 주체로 살기를 청한다. 또한 공동체적 사도직을 통해 교육에 종사하고, 회헌에 따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봉사를 펼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는 활동으로 믿음을 전파한다.

 

"우리 카리스마의 생활표현인 순박한 정신은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심과 신뢰심에서 오는 것이므로, 우리는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오로지 하나가 되신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3월 23일, 이주연 기자]

 

 

 

사진말 - 노틀담 수녀회의 사도직을 함께 나누고 있는 쥴리회 회원들.

 

 

사도직 활동

 

가난한 이 선택, 교육.선교 활동

‘마리아 정신’ 실천 앞장

 

"우리는 노틀담 수녀로서 사도적 여성 수도자의 성소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마리아의 정신에 따라 순박한 기쁨의 생활을 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교육과 그 밖에 봉사에 있어 교리와 교육을 중시함으로써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유치원, 학교, 본당, 사회복지에서 기도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노틀담수녀회 한국 관구 홈페이지 (http://www.notredame.or.kr/) 시작화면에서는 수녀회 활동과 그 지향에 대한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 그리고 교육 선교 활동 등이다.

 

 

67년 7월 한국진출

 

노틀담수녀회의 한국 진출은 1967년 7월 7일 독일 수녀회 지원 하에 입국한 세명의 독일 선교사 수녀, 그리고 같은 해 9월 15일 로마에서 초기 양성을 마치고 첫 서원한 2명의 한국 수녀에 의해 이뤄졌다.

 

한국교회와의 인연은 당시 부산교구장이었던 최재선 요한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는데 최주교는 수녀회 한국 진출을 위해 한국인 지원자들을 독일과 로마에 보내는 등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보냈다.

 

 

다섯명 수녀로 닻을 올린 한국의 노틀담수녀회는 1973년 수련소를 세우고 한국인 지원자들 입회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양성기를 맞았다.

 

이후 1975년에는 인천 박문여중고의 책임을 맡게 됐고 농촌 어린이 교육을 위해 경기도 오산과 충남 서산에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설립했다. 그사이 1968년부터 1971년까지는 도시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사회사업으로 버스안내양 교양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1987년 이후에는 인천 북구 계산동에 '노틀담 장애자 교육원'을 마련하고 신체 장애 청소년들에게 직업 훈련 교육후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1998년부터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장애인을 위한 '노틀담 복지관'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고 있다. 또한 1998년 서울 계동에서도 '쥴리학원'을 세워 학습부진아 지도 및 근로청소년 교육을 시작했는데 현재는 '노틀담 교육관'으로 개칭돼 몬테소리교육 종교교육 세미나 등을 열고 있다.

 

노틀담 수녀회에 있어 교육은 수도회 사명을 수행해 가는 특별하고 중요한 일로 꼽힌다. 이들의 교육 유산은 교사의 품위, 학생 개개인의 존엄성, 모든 수업에 있어서 철저한 준비, 종교의 중요성 등에 초석을 두고 있으며 협력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조언과 협력, 공동 결정 등을 그 기반으로 한다.

 

 

첫 사명은 선교

 

또한 수녀회는 첫 사명을 선교로 삼는다. 그런 면에서 본당 사도직을 통해 '모든 사람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한히 선하심을 선포하고 있다.

 

서울 인천 대구 대전 수원 광주 등 6개 교구에서 본당 선교를 맡고 있는 노틀담 수녀회는 최근 서울, 부산의 종합사회복지관 등에서도 봉사하고 있으며 그외 해외선교, 교구청 사도직 등 현 시대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분야에 수도회 정신을 심고 있다.

 

현재 로마에 총 본부를 두고 있는 노틀담수녀회는 한국을 포함 미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브라질 파푸아뉴기니 인도 인도네시아 탄자니아 우간다'등 세계 13개국에서 학교 유치원 어린이집 본당 기숙사 병원 양로원 등을 통해 사도직을 실천하고 하느님 증거에 나서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3월 30일, 이주연 기자]

 

참고자료

 

■  남기은 편, 영성의 향기 - 수도회 창립자들의 영성, 서울(성바오로), 1998년, 47-49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율리아 빌리아르',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852-6853쪽.

 

 

 

Please reload

2019년 12월 29일

12/28/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