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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성 이시도로(Saint Isidore of Sevilla)

세비야의 성 이시도로(Saint Isidore of Sevilla)


축 일 : 4월 4일

신 분 : 주교, 교회학자

활동 지역 : 세비야(Sevilla)

활동 년도 : 560?-636년

같은 이름 : 이시도루스, 이시도르, 이시돌



성 이시도루스(Isidorus, 또는 이시도로)는 카르타고(Carthago)에 정착하여 살다가 549년경 서고트족(Visigoths)의 침입으로 도시가 파괴되자 세비야로 이주한 에스파냐계 로마인 귀족 가문에서 560년경에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20년 정도 나이 차가 나는 큰형 성 레안데르(Leander, 2월 27일)와 누나 성녀 플로렌티나(Florentina, 6월 20일)는 카르타고에서 태어났고, 작은형 성 풀겐티우스(Fulgentius, 1월 16일)와 그는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이들 남매들은 후에 모두 성인 성녀로 시성되었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큰형 성 레안데르에게서 양육과 교육을 받은 성 이시도루스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주로 수도원과 세비야 주교좌 학교에서 보냈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적 소양을 쌓으며 성숙한 영성생활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라틴어, 문학 등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갖추게 되었다. 형 레안데르가 600년경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세비야의 대주교가 된 성 이시도루스는 형의 과업을 이어받아 서고트족을 아리우스주의(Arianism)로부터 개종시키고 에스파냐에 가톨릭 교회를 재건하는데 전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여러 차례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그중 619년의 세비야 교회 회의와 633년의 제4차 톨레도(Toledo) 교회 회의가 대표적이다.


또한 그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비롯하여 의학, 법률 등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였다. 그의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시세부토 왕의 요청으로 전 20권으로 구성된 백과사전 “어원학”을 저술하였다. 이는 이후 여러 세기 동안 교과서 및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또 역사서로 “고트족, 반달족, 스베니아족의 통치사”(Historia de Regibus Gothorum, Vandalorum, et Suevorum)도 유명하다. 또 다른 것으로 그는 모자라빅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서를 편집하였다.


이런 생활 중에서도 그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꼭 찾아보았고 사랑을 실천하였다. 보편교회와 일치하는 에스파냐 교회를 재건한 성 이시도루스는 서방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교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1598년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172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3세(Innocentius XII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오늘날 에스파냐의 인문 대학부와 마드리드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 성 이시도루스는 2000년대 중반 교황청에 의해 인터넷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또한 컴퓨터 사용자와 컴퓨터 기술자들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홈

성 이시도로 주교 학자


560년경 스페인의 세빌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형님인 레안드로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세빌리아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해박한 많은 저서를 남겼고 스페인에서 많은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관했으며, 그 공의회들은 훌륭한 규율들을 만들었다. 636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이시도로 주교의 [명제집]에서(Lib. 3,8-10: PL 83,679-682)


하늘 나라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


우리는 기도로써 정화되고 독서로써 교훈을 얻습니다. 할 수 있다면 이 두 가지를 다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할 수는 없다면, 독서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누가 하느님과 항상 함께 있기를 원한다면 자주 기도하고 또 자주 독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 자신과 함께 말하게 되며 독서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말씀하시게 됩니다.


모든 영적 진보는 독서와 묵상에서 비롯됩니다. 독서로써 우리는 모르고 있던 바를 배우고 묵상으로써 이미 배운 것을 보존합니다. 성경 독서는 이중의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첫째로 지성을 비추어 주고, 둘째로 인간을 세상의 헛된 것들에서 이끌어 내어 하느님의 사랑에로 인도해 줍니다.


독서에서도 이중의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첫째로 성경말씀의 뜻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며, 둘째로 그 말씀들을 효과적으로 또 합당하게 전하도록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읽는 사람은 무엇보다 읽는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배운 것을 다른 이들에게 최상의 방법으로 전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을 잘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읽는 것보다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합니다. 알고 싶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고민입니다. 우리가 독서를 통하여 지식을 얻고자 하는 것처럼, 배운 후에는 우리가 배운 모든 좋은 것을 실천하고자 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다음의 말씀처럼 성경을 자주 읽어 친숙해지는 일입니다. "지혜를 단단히 붙들어라. 그 지혜가 너를 높여 줄 것이다. 슬기를 품속에 간직하여라. 그 슬기가 너를 존귀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가 성경 독서를 더 자주 하면 할수록 더 풍부한 이해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을 더 잘 경작하면 할수록 더 풍요한 추수를 거둘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수한 지력을 소유하고 있지만 독서를 게을리 하여 독서로써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그 게으름으로 인해 경시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지식에 대한 애착심을 갖고 있지만 느린 이해력 때문에 장애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꾸준한 독서로써 더 우수한 지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얻지 못하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느린 이해력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독서에 대한 대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우수한 지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게을리 하는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은혜를 경시하고 또 그 지력을 무익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죄인으로 단죄받게 됩니다. 은총의 도움 없이 두 귀에 주입되는 독서의 가르침은 결코 마음에까지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밖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결코 내부에다 이익을 주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정신의 내부에 닿고 작용하여 이해력을 줄 때에, 비로소 귀로 듣는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 마음의 심층에 이르게 됩니다.


성 이시도로 주교 학자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장 · 신부).


대주교요 대학자요 저술가이며 스페인 문화의 보호 육성자, 그리고 교회 학자인 성 이시도로는 스페인 칼타지나에서 560년경 태어났다. 아버지 세베리아누스는 칼타지나의 총독이었고 어머니 테오도라는 왕의 후예였다.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3형제가 다 주교요 네 명의 형제 자매가 모두 다 성인 성녀가 되었다는 점이다. 정말 보기 드물게 빛나는 가정이었다. 맏형 레안도로는 그의 선임자로서 세빌랴의 주교였고 둘째 형 풀첸시오는 칼타지나의 주교였으며 동생 플로렌티나는 수녀가 되어 40개의 수도원과 1천여 명의 수도자를 다스렸다.


형이 세운 학교에서 형 레안도로 주교에 의해 엄격한 교육을 받은 이시도로는 공부를 잘 못해 심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야단을 맞고 학교에서 도망하던 어느 날, 얼마 못 가 피곤을 느낀 그는 우물가에서 쉬게 되었는데 구멍이 패인 바위를 보게 되었다. 바위에 구멍난 원인을 찾다가 물을 길으러 온 여인에게 물어보니, “오랜 세월 물방울이 떨어져 그와 같이 패였지요”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이 말 속에서 그가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재주 없는 자기로서도 꾸준히 노력한다면 반드시 학문으로 성공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 뒤로 용기를 내어 열심히 공부한 결과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는 물론 모든 학문을 익혀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란 말을 들을 만큼 박학다식한 사람이 되었다. 둔재로 보이던 소년이 준재가 되어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학자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599년 3월 13일 형 레안도로를 계승하여 세빌랴의 주교가 되었고 37년간을 다스렸다. 당시 스페인은 고트 족이 침입하여 전국을 정복하고 학문과 문화를 퇴폐케 하였으며, 그들 사이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주의의 이단이 번성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아리우스 주의의 이단을 뿌리 뽑고 단성론자들을 쳐부수는 한편 학문과 문화 육성에 힘썼다.


바쁜 교구 사목 가운데서도 그의 저술은 끊이지 않았다. 천문, 지리, 역사, 성서, 교리, 전례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글을 쓰는 한편, 유명한 인물들의 전기도 썼다. 가장 유명한 저서는 백과사전격인 20권의 “에티모로지애”이다. 이는 134명의 저자들의 글을 인용, 당대의 모든 분야의 학문과 지식을 집대성한 것으로 16세기까지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그를 중세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그는 스페언 교회의 규율을 확립하고 수차에 걸쳐 전국 차원의 공의회를 주재하였으며, 특히 633년 제4차 톨레도 공의회에서의 그의 공로는 매우 크다. 여기서 그는 성가와 성무일도, 미사에 있어서 전례의 통일성을 기했으며 모든 교구에서 신학교를 세워 사제 양성에 전력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공부하지 않는 자는 서품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많은 학교를 세워 의학, 법률, 예술 및 그리스어 히브리어의 공부를 촉진시켰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장려하였다. 그는 스스로 수도자의 보호자로 생각하고 수도 규칙에 대한 글도 쓰고 수도원을 세우도록 고무하였으며 619년엔 수도자를 괴롭히는 자는 파문한다고 선언하였다.


601년 로마에 갔다가 귀로 중 나르본느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거기서 가뭄으로 곤궁에 처한 주민들이 비를 내리도록 기도해 줄 것을 그에게 간청하였다. 그는 그들과 함께 기도함으로써 즉시 비를 내리게 하여 말라죽던 곡식들이 생기를 찾았다고 한다.


임종의 날을 알고 있던 그는 그날이 되자 자기의 재산을 전부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성당에 가 참회의 옷을 업고 머리에 재를 바르고 열심히 기도한 후 병자성사를 받고 고요히 눈을 감으니 그때가 636년 4월 4일이었다.


그가 죽은 뒤 14년 후에 열린 제8차 톨레도 공의회는 그를 “뛰어난 박사, 가톨릭 교회의 영광, 최근의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존경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성교회의 학자라는 이름에 합당한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보다 더 성인이라 부르기에 합당하였다. 그는 박학하였지만 겸손하고 애덕에 출중하여 가난한 자에게 애긍시사하길 좋아하고 죄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인자하고 너그러웠다.


그는 그의 명제집에서, 신앙 생활에 있어 기도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알고 싶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고민이라고 하며, 기도나 독서를 통해 깨달은 것은 반드시 실천하도록 당부한다.


1598년 시성되고 1722년 교회박사로 선포되었으며 축일은 4월 4일.


둔재가 준재가 되어 세기를 풍미한 것은 기도와 끝없는 노력 때문이었다. 우리도 주어진 능력을 한탄만 하질 말고 성인을 본받아 기구하고 분투 노력한다면, 둔재가 준재가 될 수 있고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있으리라.


[경향잡지, 1987년 4월호]

[성화 속 성인 이야기] 성 이시도르



성 이시도르, 바르톨로메오 에스테반 무리요, 1695, 세비아 대성당.



스페인은 수많은 성인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가톨릭 국가 중 하나이다. 이 스페인 출신의 성인들 중에는 아빌라의 대 데레사나 이냐시오 등 우리 한국교회에 잘 알려져 있는 성인들도 있지만 또 한편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이름의 성인들도 많다. 그중 성 이시도르는 제주도에 골롬반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이시돌 목장으로 인해 그 이름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스페인의 성인들 중에는 이 이시도르라는 같은 이름의 성인도 여럿이 있다. 제주 이시돌 목장의 주보성인은 농부였던 성 이시도르이고,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성인은 4월 4일이 축일인 세빌랴의 대주교요 교회학자인 성 이시도르(560?-636)이다.


성 이시도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그리스계 출신으로, 스페인 남동부 카르타지나에서 560년경 태어났다. 이시도로의 아버지는 카르타지나의 총독이었고, 어머니는 스페인 왕실과 친척이었다. 이시도르의 맏형 레안데르는 수사가 되었다가 그 뒤 세빌리아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작은형 풀젠시오는 카르타지나의 주교가 되었다. 그리고 누이 플로렌티나는 수녀가 되어 거룩한 수도생활을 하며, 40개의 수도원과 1천여 명의 수도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들 형제 모두 후일 성인품에 올랐다.(레안드르 2월 27일, 풀젠시오 1월 16일, 플로렌티나 6월 20일)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495년경 서고트족(Visigoths)의 침입으로 도시가 파괴되자 그의 부모는 세비야로 이주하였다. 그 후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세비아의 대주교가 된 큰형 성 레안데르는 자신이 세운 학교에서 동생 이시도르를 교육시켰는데 아주 엄격하게 대했다고 한다. 이시도로는 부지런했지만 어려서는 학업의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뒤쳐지는 학업 성적에 심한 꾸지람을 듣고 학교에서 뛰쳐나갔는데, 얼마 못 가 지쳐 어느 작은 우물가에서 쉬게 되었다. 그런데 바위 한쪽에 움푹 파진 곳이 보였다. 그는 그렇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했지만 좀처럼 알 길이 없었다. 얼마 뒤 물 길러 온 한 여인에게 물어보니 “오랜 세월 물방울이 떨어져 그와 같이 파졌다”라는 것이었다. 이를 듣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즉 지금 학업성적이 형편없지만 꾸준히 노력만 한다면 반드시 성공의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학교로 돌아가서 꾸준히 노력하였고, 그 결과 눈에 띄게 성적도 향상되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적 소양도 쌓으며 성숙한 영성생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는 물론, 문학 등 모든 학문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갖추게 되어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란 말을 들을 만큼 박학다식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왕위에 있던 레오질도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의 이단에 빠져 교회를 배반했다. 세비아의 주교가 된 이시도로의 형 레안데르는 과감하게 이 이단과 싸우다 왕의 비위를 크게 거슬러 마침내 국외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600년경 공석이 된 세비아의 주교좌에 레안데르의 동생인 이시도로가 선발되어 세비야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형과 같이 언변과 문필로써 눈부신 활동을 했다. 그는 35년간 주교직에 있으면서 스페인의 국가 통일을 위한 투쟁했고, 서고트족이 아리우스 이단에서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재건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여러 차례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그중 619년의 세비야 교회 회의와 633년의 제4차 톨레도(Toledo) 교회 회의가 대표적이다.


그는 성가와 성무일도, 미사에 있어서 전례의 통일성을 기하여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모자라빅 전례를 완성하기도 했다. 또한 모든 교구에 신학교를 세워 사제 양성에 전력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고, 공부하지 않는 자는 서품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많은 학교를 세워 의학, 법률, 예술 및 그리스어 히브리어의 공부를 촉진시켰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장려하였다. 그는 수도 규칙에 대한 글도 쓰고 많은 수도원을 세우도록 고무하였다.


그는 이렇게 바쁜 교구 사목 가운데서도 천문, 지리, 역사, 성서, 교리, 전례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글을 쓰는 한편 유명한 인물들의 전기도 썼다. 가장 유명한 저서는 백과사전격인 20권의 “에티모로지애”이다. 이는 당대의 모든 분야의 학문과 지식을 집대성한 것으로 16세기까지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그를 중세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이 작품에는 고트족, 반달족과 스웨브족의 역사, 에우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의 작품들에서 자료를 모았는데 이 작품에서 국가제도와 긴밀히 연관된 서고트족의 그리스도교를 위한 포괄적인 종교윤리를 세 부분, 즉 ‘교의’, ‘영성’, ‘도덕’으로 나누어 서술했다.



박학하면서도 겸손하고 이웃 사랑의 덕 또한 출중해


그는 그의 명제집에서, 신앙생활에 있어 기도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기도나 독서를 통해 깨달은 것은 반드시 실천하도록 당부했다. 이렇게 그는 박학했지만 그 일면에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 또한 출중해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과 희사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601년 그는 로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르본느에 들르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은 매우 가물어 곤궁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성인에게 비를 주실 것을 하느님께 빌어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함께 기도를 바쳤고, 하느님께서는 즉시 들어주시고 비를 충분히 내려 주셔서 말라죽어가던 곡식들이 푸릇하게 생기를 다시금 띠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시도르는 거의 80세가 될 때까지 쉴 새 없이 계속 일했다. 자신의 임종의 날을 알고 있던 그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6개월 동안에 임종 준비를 하며 애덕을 더욱 발휘하여 자기의 재산을 전부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성당에 가 참회의 옷을 업고 머리에 재를 바르고 열심히 기도한 후 병자성사를 받고 고요히 눈을 감으니 그때가 636년 4월 4일이었다. 이시도르는 1598년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시성되고, 교황 인노첸시오 13세에 의해 1722년 교회박사로 선포되었다. 그의 사망 14년 후에 열린 제8차 톨레도 공의회는 그를 “뛰어난 박사, 가톨릭교회의 영광, 최근의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존경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오늘날 스페인의 인문 대학부와 마드리드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 성 이시도르는 2000년대 중반 교황청에 의해 인터넷의 수호성인으로도 선포되어 그는 또한 컴퓨터 사용자와 컴퓨터 기술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기도 하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4월호, 장긍선 신부(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이시도로 주교 학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17-320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이시도로, 스페인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7019-7021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이시도로 주교 학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85-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