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

02/08/2016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Michael Febres Cordero)

 

 

 

축         일  :  2월 9일

신         분  :  교육자

활동 지역  :  에콰도르(Ecuador)

활동 년도  :  1854-1910년

같은 이름  :  마이클, 미가엘, 미겔, 미구엘, 미키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는 1854년 11월 7일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쿠엥카(Cuenca)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에서 싸운 유명한 레온 페브레스 코르데로(Leon Febres Cordero) 장군이며, 그의 아버지는 국내 정치 사안에 영향을 끼치던 프란치스코 페브레스 코르데로 몬토야(Francisco Febres Cordero Montoya)였다.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매력 있는 교양인이었으며 5개 국어에 능통했다. 성인이 태어날 즈음에는 쿠엥카의 신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의심할 필요 없이 성 미카엘의 성소는 그의 어머니인 아나 무뇨즈(Ana Munoz)와 신심 깊은 외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1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5명이 수녀가 되고 1명은 예수회 사제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학자 성인의 탄생을 위해 완벽한 가족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9살 때 성 미카엘은 1863년 요한 세례자 드 라 살(Joannes Baptista de la Salle, 4월 7일)의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가 쿠엥카에 세운 학교의 첫 학생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접하게 된 지성의 생활과 수도회의 겸손한 생활양식을 사랑했다. 그래서 후일에 기록하기를 “수도회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언젠가 거룩한 수도복을 입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언제나 수사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가족 중에서 사제가 나온다면 자랑스러워 했겠지만 평수사가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이해할 수 없어서 반대하였다. 수도생활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성 미카엘은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심하게 앓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어머니는 수사로서 아들의 성소를 인정하였다.

 

1868년 3월 24일 그는 쿠엥카에서 수도회의 검은 수도복을 입으면서 미카엘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그 수도회 최초의 방인 성소자로 입회하여 수도복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모교에서 언어(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가르쳤으며, 일 년 후 키토(Quito)의 학교로 발령받았다. 그가 부임했을 당시 6년 된 학교에는 250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다시 6년 후 학생 수는 천 명을 넘어섰다. 이 시기에 성 미카엘 수사는 자신이 쓴 많은 책 중 첫 번째 책을 출판하였다.

 

하지만 세속 과목들을 가르치고 집필하는 것은 그의 첫째가는 기쁨은 아니었다. 그의 첫 번째 기쁨은 어린이들의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다. 성 미카엘 수사는 자신의 가르침을 사도적 성소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대 사회의 가련한 상태에서 나의 거룩한 구세주께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모든 선에 있어서 나의 절대적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영혼의 승리에로 나를 부르신다. 내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막을 수 있을까?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에게 실망할까봐 두려워할 수 있을까? 사랑과 감사의 이 모범을 거부할 만큼 대담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맡는 모든 일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맡아야 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나를 채용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교육자로서 성 미카엘의 재능은 키토의 학교들의 공식 검열관으로 지정되면서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교육과 수도생활 중에 학자로서의 임무를 지속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성 미카엘은 교과서를 쓰고, 교리교재, 시와 그리스도교 영성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는 카스티야(Castilla) 에스파냐어 연구에서 특출한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 중 몇 권은 에콰도르의 모든 학교에서 필수 교재가 되었다. 결국 그는 1892년 에콰도르 학술원 회원이 된 후 에스파냐 왕립 학술원, 프랑스 학술원, 베네수엘라 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07년 3월 성 미카엘은 프랑스어로 된 더 많은 교과서와 다른 책들을 번역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가게 되었다. 프랑스 시민사회와 종교의 불안한 기운은 수도회의 작품을 프랑스 외부에서 지속시킬 수 있도록 드 라 살 연구소(De La Salle Institute)의 문서들을 에스파냐어로 번역해야 할 급박한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 미카엘은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4월) 앓게 되었고, 병이 낫자마자 파리의 세브르 거리에 있는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내 방이 있고, 책이 있으며, 근처에 성당이 있다. 이것이 완벽한 행복이다.”

 

7월에 그는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벨기에의 브뤼셀 근교에 있는 모원으로 이동하였으며 벨기에의 총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더 많은 집필을 위해 유럽에 계속 머물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성 미카엘은 번역작업에 몰두하다가 건강에 무리가 와서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근처의 청원자 숙소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몇 달 동안 에스파냐어를 가르쳤다. 1909년 7월 26일 바르셀로나에서 시민혁명이 시작되어 시민들이 수도원을 공격하고 교회 재산을 파괴하여 모든 수도자들에게 큰 근심이 되었다. 그로 인해 1910년 1월 감기에 걸린 성 미카엘 수사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1910년 2월 9일 동료 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종하였다. 교사와 학자로서 성 미카엘 수사의 명성은 그의 성덕과 일치했다. 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그에 대한 대중신심이 생겼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그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현존을 강하게 느끼는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성 미카엘의 첫 전기 작성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에콰도르의 형제는 시간이 조금 흐르면 변질되는 외적 아름다움의 은총을 받지는 않았다. 키는 컸지만 그의 자세는 어렸을 때부터 구부정했다. 용모는 어두웠고 여위었으며, 금욕 실천과 지병으로 인한 주름살이 깊은 고랑을 이루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 표정은 그의 영혼과 하느님의 은총의 조명으로 인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평화롭고 친절한 본성에서 나오는 온순함이 흘러넘쳐 반향된 것이다. 그의 매우 가는 입술은 항상 지속적이고 은총 가득한 웃음을 지니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눈은 가장 순진한 어린이의 눈빛이었으며,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설명할 수 없는 평화에 기인할 수밖에 없는 고요함과 기쁨으로 인해 반짝거렸다. 그의 생김새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표현은 조용하고 침착한 정신이 그 밑에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성 미카엘의 유해는 1936년 스페인 내전 중에 에콰도르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1937년 2월 5일 에콰도르에 도착했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짧은 시간 안에 키토에 있는 그의 묘소는 성지순례의 중심이 되었다. 정부는 그를 기리기 위해 기념우표를 발행하였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공공 공원에 기념물을 세웠다. 1955년 6월 4일 3만 명의 학생이 참여한 거대한 행진 후에 동과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성 미카엘은 1977년 10월 30일 동료 수사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Mucianus Maria Wiaux, 1월 30일)와 함께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10월 2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에콰도르 최초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미구엘 페브레스 코르데로 - 하느님의 은총으로 걸을 수 있게 된 에콰도르 최초의 성인

 

 

성 미구엘 페브레스 코르데로(Miguel Febres Cordero, 1854-1910)는 1854년 11월 7일 에콰도르(Ecuador) 쿠엥카(Cuenca)의 존경받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날 때부터 발이 기형적이었던 그는 큰 고통 속에서 자랐는데 다섯 살이 되었을 때 환시(幻視)를 본 다음 비로소 걷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족들은 이 사건을 체험하면서 하느님께서 이 어린 소년을 특별한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그를 판초(Pancho, 프란치스코의 스페인식 이름)라고 불렀다.

 

집에서 교육을 받던 미구엘 페브레스는 1863년 드 라 살(Joannes Baptista de la Salle)이 창설한 그리스도 교육수도회(Christian Brother)가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갔고, 이 학교에서 그의 눈부신 재능은 빛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학교에 다니는 도중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수도자로 부르고 계심을 깨달았다. 성소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은 그러한 생각에 반대하면서 세상에 나가 그가 가진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성공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은 그가 사제의 길을 가면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그를 쿠엥카에 있는 신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렇지만 신학교에 들어간 그는 중병에 걸려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이후 건강을 되찾은 미구엘 페브레스는 그리스도 교육수도회에 입회하였고 1868년 그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수도복을 입었다. 이로써 에콰도르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그리스도 교육수도회 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건강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수련기를 쿠엥카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는 수련기를 보내면서 10대 후반부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20세에 그가 처음 펴낸 책은 스페인어 문법에 대한 것으로 매우 훌륭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상식이 풍부하여 사람들로부터 타고난 선생님으로 존경을 받았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치열한 기도생활을 하였다.

 

 미구엘 페브레스는 꾸준한 연구 활동을 통하여 학계로부터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마침내 프랑스, 스페인, 에콰도르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그에 못지않게 예수 성심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또한 탁월하였다. 그는 자연과학 및 교육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그가 이룩한 학문 분야의 업적에서 살아 숨 쉬는 영성적 가치의 심오함에 감탄하였기 때문이었다.

 

1907년 미구엘 페브레스는 벨기에로 가는 도중 뉴욕을 방문하였다. 뉴욕에서 그는 자신의 책을 번역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번역하느라 가뜩이나 병약한 상태에서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스페인의 프레미아 델 마르(Premia del Mar)에 있는 그리스도 교육수도회의 청원자들을 위한 수련소로 갔다. 그러낟 kd시 스페인의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은 그와 그의 제자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1909년 7월 스페인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을 때 프레미아 델 마르도 공격을 받았다. 미구엘 페브레스는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우선 성당 안에 모셔진 성체를 꺼내어 정성을 다해 보호하면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침착하게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그에게 상당히 고된 것이었기 때문에 체력을 많이 손상하여 폐렴에 걸리게 되었고, 끝내 이 병으로 1910년 2월 9일 선종하였다. 미구엘 페브레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에서 그가 추진하던 일을 도와주고 지지하던 많은 신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936년 7월 21일 프레미아 델 마르는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다시 공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경당에 불을 질렀고 약탈 중에 미구엘 페브레스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시신은 전혀 부패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시신은 이후 에콰도르로 옮겨졌는데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Quito)에서 그의 시신을 모신 행렬이 거리를 지나가고 있을 때, 신체장애자인 한 소년이 그의 관에 손을 대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 성한 몸이 되었다.

 

1977년 10월 30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미구엘 페브레스를 복자품에 올렸고 1984년 10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시성식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회는 성 미구엘 페브레스 코르테로를 학교의 사도로서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를 복음화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한 사람으로 또한 선교사의 참된 모범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 성 미구엘 페브레스는 당신에게 보내진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그리스도교인의 정신을 교육시키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투신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여 영웅적으로 이를 나누어 지고 갔습니다.”

 

성 미구엘 페브레스 코르데로의 축일은 2월 9일이다.

[교회와역사, 2010년 5월호, 번역 송영웅 바오로(봉명학원 재단이사)]

[금주의 성인]

성 미구엘 페브레스 코르데로(St. Miguel Febres Cordero, 2월 9일)

 

1854~1910년, 에콰도르 출생 및 스페인 사망,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 수사, 에콰도르 첫 성인.

 

 

 미구엘 페브레스 코르데로 수사는 남미 국가 에콰도르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성인입니다. 그는 뛰어난 교육자이자 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는데, 많은 이들은 그의 학문적 업적보다는 그의 성품과 깊은 신심을 더욱 칭송합니다. 책을 집필하고 번역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로 매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면서도, 그는 언제나 온화했고 한없이 부드러웠습니다. 깊은 성찰과 묵상, 기도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인은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한쪽 발에 문제가 있어 5살 때까지 스스로 걷거나 일어서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인의 부모님은 어린 아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습니다. 다섯 살 난 성인은 부모님께 달려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미꽃이 핀 정원에 아름다운 아주머니 한 분이 서 계셨어요. 하얀 드레스를 입고 파란 망토를 두르신 아주머니께선 제 이름을 부르셨어요. 그래서 전 일어나 그분을 따라갔어요.”

 

성인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려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성인은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가 운영하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님은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원했지만, 성인은 평수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뛰어난 언어 감각을 지닌 성인은 17살 즈음에 스페인어 교재를 썼는데, 여러 학교들이 이 책을 스페인어 교과서로 쓸 정도였습니다. 성인은 수도회 부탁을 받고 프랑스어와 영어로 된 수도회 자료와 책들을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번역 일에 매달렸습니다. 또한 그의 명성을 듣고 유럽 교회에서 그를 초청하는 일이 잦아져 여러 나라를 다녀야 했습니다.

 

고된 업무로 건강을 잃은 성인은 스페인의 한 수도원에 머물며 요양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발발한 스페인 혁명으로 성인이 머물던 수도원은 시민들에게 공격당했고, 성인은 피신하던 중 폐렴에 걸려 숨지고 말았습니다. 성인이 선종한 지 26년 뒤, 성인 무덤이 있는 수도원을 약탈하던 이들은 성인의 무덤을 훼손하다 전혀 부패하지 않은 성인 시신을 보고 모두 달아났습니다. 이후 성인 유해는 에콰도르로 옮겨졌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성인을 시성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2월 8일]

 

참고자료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 미구엘 페브레스 코르데로’,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87-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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